[자본시장 속으로] 개념의 오해와 제도의 흠결

입력 2020-01-08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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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구조 분야 교수, 관련 업계 동료들을 사석에서 만나면 20대 젊은이와 같은 순수한 꿈과 열정을 접할 때가 많다. 일을 평생의 소명으로 여길 뿐 아니라, 자본시장의 현실 대비 법 제도의 오해와 공백 등을 진정으로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자주 접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 사회가 조금씩 더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에 감사함을 느낀다. 이론과 현실 사이에 간극이 있을 때, 온당한 인식과 정서는 시간이 걸릴지언정 반드시 개선된 현실을 만들어 낼 거란 믿음이 있어서다.

최근 몇 년간 동료들끼리 안타까워했던 ‘개념의 혼동’ 중 하나는 ‘연금사회주의’(Pension Fund Socialism)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나 수탁자로서 책임활동 얘기가 나오면 늘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단어다. 정부 산하의 국민연금을 동원해 기업 활동에 개입하고 간섭하는 것은 국가가 경제를 직접 담당하는 사회주의와 다르지 않다는 비판이다.

만일 1976년 연금사회주의를 주창하기 시작한 피터 드러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분명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그는 미국 국민이 낸 연금의 상당 부분이 기업에 투자됐으므로, 이제 ‘노동자도 자본가요, 근로자를 위한, 연금에 의한 사회주의’라는 의미로 역설했다. 나아가 이는 첨단 자본주의 국가에서 발생하고 있는 ‘자본’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이므로, ‘일찍이 유례없던 혁명’(The Unseen Revolution)이라고 일갈했다. 하지만 다수 언론에서 연금사회주의는 ‘정부의 불합리한 개입’이란 개념으로 여전히 왜곡해 사용하고 있다.

개념상 혼동은 전체 메커니즘의 파악과 현실 확인을 통해 제거할 수 있다. 원래 뜻을 인과 사슬로 좀 더 확장해 보자. 근로자는 회사가 고용하므로 개념상 회사가 근로자보다 우위에 있다. 회사의 주인은 주주이므로 의사결정 체계상 회사보다는 기관투자자가 우위에 있다. 이러한 기관투자자에게 자금 운용을 위탁하는 것은 국민연금이므로 업체 선정과 운용 방식 등의 결정에 있어 우위다. 국민연금은 정부 산하 기관으로 국정감사 등 국회의 견제를 받으므로, 국회가 우위에 선다. 국회를 구성하는 국회의원을 국민이 뽑으므로 국민이 최고 우위가 된다.

이 개념을 가지고 다시 현실을 보자. 이상하게도 연금을 내는 국민, 근로자들이 전혀 최고 우위에 있지 않다.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2019년 4월 말 기준 한국의 국민연금 가입자 수는 약 2200만 명, ‘인구의 절반’에 육박한다. 2019년 10월 말 기준 국민연금 적립금은 약 712조 원으로 한국 ‘실질 GDP의 40%’에 이르는 금액이다. 이 중 39%가 주식, 49%가 채권이므로, 국민은 약 88%의 자금을 제공해준 자본가로서 책임활동을 할 수 있다. 이제 연금사회주의 의미와 필요성, 그 중요성이 뚜렷하게 다가온다. 공정한 기준에 따라 어떻게 잘 활용할지가 남아 있을 뿐이다.

‘제도상의 공백’에서도 안타까울 때가 많다. 일례로, 한국의 기업 승계와 증여의 새로운 공식으로 정착된 ‘일감 몰아주기’ 규제는 공정거래법상 ‘자산 5조 원 이상’(비금융업종) 기업집단에 한해서만 적용된다. 자산 5조 원 미만의 기업집단은 부당지원금지 규제 적용은 받지만, 총수 일가의 일감 몰아주기상의 제재는 받지 않는다.

법 제도가 ‘현실보다 후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 역시 전문가 동료들 사이에서 주요한 논의거리다. 공정거래법 제23조가 대표적이다. 기존 조항에서 ‘다른 회사’에 대한 부당지원 행위만 처벌하던 것을, S사 최대주주의 사익편취 사건이 발생하자 ‘총수 일가’의 부당한 이익 제공 행위가 포함되도록 개정했다. H사의 일감 몰아주기 사례가 발생한 후에는 기존의 ‘정상가격보다 상당히 유리한 조건의 거래’에서 가격 외에 ‘상당한 규모의 거래’까지 그 규율 범위를 확대했다.

해당 회사는 2001년 자본금 125억 원에서 현재 시가총액 5조 원대의 회사로 성장했다. 하지만 자본시장 관련 법제는 그 성격상 사전에 여러 가지 규율을 강제할 수 없다. 시장에서 자율적 견제로 풀어야 하는 문제다. 법 제도나 정부의 규제 이외에 연금 등 기관투자자의 역할이 더욱 중요한 이유이다.

이론적으로 자유주의는 불간섭을 원한다. 반면, 공화주의에서는 정당한 절차와 공동선을 위한 것이라면 합리적 견제를 용인한다. 한국의 영문 명칭은 Republic of Korea로 공화국이다. 이론과 현실의 합리적 균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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