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 칼럼] 익명(匿名)사회의 그늘

입력 2016-06-29 10:46 수정 2016-06-29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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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교수

우리 가족은 1980년대 초반 자그마한 마당이 있던 집을 떠나 한강 이남에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한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수도꼭지를 틀면 따뜻한 물이 나오고 집안에 목욕탕까지 갖춘 현대적 생활양식을 마음껏 즐길 수 있을 테지 하던 기대와 흥분도 잠시, 한동안 식구들은 집에만 들어오면 별것도 아닌 일에 화를 벌컥 내고 특별한 이유도 없이 싸움을 걸곤 했다. 당시엔 미처 생각 못했었는데, 어쩌면 아파트에 들어서며 현관문을 닫는 순간 이웃과 완벽하게 단절되는 불안감과 고립감이 막연한 분노와 무력감으로 표출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 들어 주말이면 농촌생활에 한 발을 슬쩍 담가보고 있는 중인데, 여러 면에서 도시생활의 익명성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는 실명(實名) 공동체의 자취를 종종 발견하게 된다. 아침저녁으로 마을 확성기를 타고 “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로 시작되는 이장님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마다, 피식 웃음이 터지면서 ‘이곳은 정녕 서울이 아니구나’ 실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장님은 ‘내년 봄 필요한 퇴비나 비닐하우스 지원 자금을 신청하라’는 공지사항을 전달하기도 하고, 인근 의대(醫大) 학생들이 노인 의료봉사를 나왔으니 많이들 참여하시어 건강을 위해 힘쓰라 권유하기도 하며, 오늘 낮엔 기온이 35도까지 올라간다고 하니 어르신들께선 밭일을 삼가라는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어느 댁 어르신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 또한 이장님의 주요한 역할 중 하나다. 언제 돌아가셨고 발인은 언제이며 장지는 어디인지 부고를 듣고도 조의금(弔意金)을 전달할 연고가 없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외지인(外地人)’임을 절감하게 된다.

마을의 남녀노소가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노라면, 젊은 시절 바람피운 남편 흉도 보고, 자식농사 잘된 집 부러움 섞인 시샘도 하면서, 가출했던 부인이 돌아왔단 소식에 가슴 쓸어내리기도 하고, 10년을 한결같이 지극정성으로 마누라 병수발하는 남편 걱정까지 나누는 소리가 들려온다.

지난주엔 하루도 빠짐없이 저녁 먹을 시간이 되면 어설픈 솜씨로 피리 연습하는 소리가 동네방네 퍼져갔는데, 지나가던 할아버지 왈 “우리 손녀가 피리 부는 소리여. 처음엔 한심하더니만 이젠 제법 피리 소리가 나네. 시험 본다고 열심히 연습 중이구먼” 하신다. 오늘도 음정과 박자가 자꾸만 어긋나는 피리 소리를 듣자니, 할아버지의 초등학교 4학년생 손녀딸의 통통한 얼굴이 떠오르면서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만일 똑같은 피리 소리가 서울 아파트 단지에서 흘러나왔다면 틀림없이 소음 공해라 여겼을 텐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층간소음이 이웃 간의 고질적 갈등으로 비화하고,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분노와 혐오를 표출하는 ‘묻지마 범죄’가 횡행하며, 기본적 예의조차 실종된 상황에서 봉변당하지 않으려 외면하는 비겁함이, 건강한 시민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압도하고 있는 현실이야말로 익명사회의 어두운 그늘 아니겠는지.

그렇다고 익명사회의 부작용을 외면할 수만은 없는 일. 여기서 농경사회 특유의 공동체적 생활양식을 미화하거나 지나온 과거에 대해 환상을 부추길 생각은 없다. 익명사회가 허용해주는 표현의 자유나 개인주의화로 인한 자율성의 증대 등은 긍정적 모습임이 분명하다. 대신 익명성의 그늘에 숨어 개인의 무책임을 정당화한다거나 도덕적 해이를 당연시함은 물론 파괴적 범죄를 일삼는다면, 이는 명백히 익명사회가 극복해야 할 부정적 모습일 것이다.

관건은 익명이냐 실명이냐의 이분법이 아니라, 중지(衆智)를 모아 익명사회의 강점과 실명사회의 장점을 결합해낼 수 있는 새로운 가치와 규범 그리고 행동양식을 만들어내는 일일 것이다. 공동체적 삶을 향한 신선한 시도가 이곳저곳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한 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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