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음에도 정치적 경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후보단일화를 하지 못해 대선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패했고 이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고 전했다.
미국 유력 일간지인 워싱턴포스트(WP), 월스트리트저널(WSJ), ABC방송 등도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보도했다.
WSJ는 “김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금융실명제를...
다만,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으면서도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후보단일화를 하지 못해 대선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패했으며, 이로 인해 비판도 받았다고 전했다.
이 외에도 미국 유력 일간지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 USA투데이와 ABC방송이 AP통신의 기사를 인용해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보도했다.
92년 대선에 승리해 93~98년 제 14대 대통령을 지내면서 전두환 노태우 등 지난 군부정권 핵심인사들을 축출했다.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통해 1993년 8월 12일 이후 모든 금융거래에 실명제를 도입하는 등 개혁을 이뤘지만, 1997년 외환위기로 IMF 금융구제를 요청하는 등 경제정책은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영삼정권에선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으로 벌여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을 구속시켰고, 노태우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이른바 ‘5공 청산’에 나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백담사로 유배 보냈다.
이와 관련, MB계인 새누리당 정병국 의원은 지난달 말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박근혜정부의 전방위적인 해외자원개발사업 비리 수사를 “기획 수사”로 규정하면서 “과거에...
그러나 1987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6·29 민주화 선언 이후 이들은 대척점에 서게 됐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는 각각 보수세력과 민주세력으로 상징되는 동시에 영남과 호남의 대표 정치인으로 거론됐다. 정치권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를 ‘물과 기름’으로 비유했다.
DJ서거 후 YS는 위로 만찬 초청 의사를 밝혔고, DJ의 동교동계가 이를 흔쾌하게 수용해 눈길을...
그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불거진 민주화의 열기속에 '호헌철폐, 독재타도' 구호를 내걸고 대통령 직선제를 갈구하던 6월 항쟁끝에 결국 노태우 민정당 대선 후보자는 6.29선언을 통해 민의를 결국 수용했다.
김 전 대통령도 결국 사면에 따라 1987년 8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에 취임했다.
하지만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YS와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