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속상해하면서도 끝까지 ‘뜻[지(志)]’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스러져간 호연재. 그런 그녀에게 ‘뜻’이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남편이라 해도 침범할 수 없는 ‘자존’이 아니었을까? 호연재를 만나면서 지금 ‘나’는 자존이란 단어를 잊고 있지나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복녕궁주는 1133년에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녀는 없었으며,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남편은 그녀보다 13년 뒤인 1145년에 세상을 떠났다. 복녕궁주는 고려 전성기의 공주로서 왕실의 족내혼(族內婚)과 여성의 재산상속과 처분권, 신앙생활 등 다방면에 대한 지식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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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아내의 죽음을 맞아 “함께 무덤에 묻히지 못해 애통하다”며 절절한 심정으로 묘지명을 썼다.
그러나 아내의 빈자리가 너무 컸던 탓일까? 최루백은 이후 유씨(柳氏) 부인과 재혼하여 100세가 넘도록 수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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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하고 검소하여 집안을 일으켰고/자애와 어짊으로 장수를 누렸네.//돌에 새겨 무덤에 넣었으니/향기로운 이름 사라지지 않으리라.
심지의는 약 900년 전의 여성으로, 당시 사회가 요구하던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던 여성이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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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녀는 전근대 시대에 일찍부터 있어왔고, 또 재주와 기예와 교양을 갖춘, 상대적으로 지식층이었다. 때문에 기개가 있는 기녀, 시에 능한 기녀, 남성을 패가망신에 이르게 한 기녀 등 기녀와 관련된 일화는 수없이 많다. 자운선은 미모를 무기로 이기적 욕망을 채웠던 나쁜 기녀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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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란이 터지면서 그녀의 남편 의종이 죽고, 여동생[광정태후(光靖太后)]의 남편인 명종이 즉위했다. 이후 다시 명종이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쫓겨나고 여동생[선정왕후(宣靖王后)]의 남편인 신종이 왕위에 올랐다. 장경왕후의 세 자매를 통해 무신란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의 여성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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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 출신 왕비의 소생이 ‘태자’로 불렸다는 점을 보면 가야국에서의 삶이 볼모와 같은 생활을 했던 약소국 출신의 여성 사례와는 다르지 않았을까 한다. 이국 출신이지만 적통 왕비로서의 권위를 누리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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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관련 문헌사료에서 신라 초기에는 여성 신격이 주로 나타나고 종교적 의미를 가진 여성의 모습이 보이나, 점차 신격이 남성으로 변화되고 있으며 일관(日官)과 같은 보다 분화된 직책을 가진 남성이 등장하는 변화상을 통해서도 이 같은 점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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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어진 운명에 순종하면서 살지 않았다. 남편의 억울한 죽음에 직접 나서서 복수를 하였으며, 또한 당시 어렸던 아들의 교육에도 힘써 뒷날 적법한 왕위 계승자가 없는 상황에서 아들이 신하들에 의해 추대되어 왕이 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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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로서는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위덕왕의 안위(安慰)에 대한 기원도 했을 것이다. 정략의 희생양으로 적국인 신라로 가서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후궁으로 살아야 했던 다른 여형제에 대해서도 부처님의 가호에 기댈 수밖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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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로써 맞이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맞이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것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두 사람이 동숙을 하였지만 혼인관계는 그것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낙랑공주가 호동왕자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데는 이러한 ‘서옥제’ 혼인 형태의 불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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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에서는 민족의 고통을 가볍게 아는 ‘기집아’들에 치이면서, 그 틈바구니에서 누구보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살던 그대”를 부르며 고인을 추모했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시처럼, 고정희는 자신의 시보다 더 큰 여백을 남기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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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중국, 일본 등 해외 공연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10년에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판소리 1인 창무극 심청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사회적 약자들의 삶에 눈감지 않고 그것을 예술무대에서 재현하고자 했던 최고의 춤꾼 공옥진은 2012년에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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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에 사망한 뒤 제10회 여성영화인축제에서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억척여성으로, 귀신으로, 악녀로, 요부로 스크린을 누비던 도금봉은 ‘착하고 예쁘고 정숙한’ 여배우 캐릭터가 넘쳐나는 시대에 새로운 여배우 상(像)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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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1월 민주회복국민선언과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등에 참여했다. 이 공로로 1975년 막사이사이상, 1982년 유네스코 인권교육상, 1989년 브레넌 인권상 등을 수상했고, 199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받았다. 한국여성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이태영은 1998년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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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을 맡았으며, 1976년에는 ‘3·1사건 가족대책협의회’ 회장으로 남편의 석방운동을 했다. 1977년에는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회장이 되어 여성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지원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한국 민주화 운동 역사의 한가운데 있었던 공덕귀는 1997년 안국동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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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2대 총선에서도 금산에서 당선되었다. 1953년에는 중앙대학교 초대 총장, 5·16 후에는 민주공화당 중앙위원과 대한부인회 회장을 지냈다. 1977년 승당 임영신, 미국 이름 루이스 임(Louise Yim)은 ‘여성 최초’라는 수많은 수식어를 남긴 채 유명을 달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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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복이 산기(産氣)가 있다고 하자 이문건의 아내가 내려가 직접 출산을 살펴주었다. 이문건은 향복의 출산 사실만 기록할 뿐 그 아비가 누구인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제 향복의 어린 딸도 할머니 삼월(三月), 어미 향복과 함께 대를 이어 이문건 집안에서 부림을 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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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수기는 기녀를 지나치게 투기한 양반부인이 미웠던지, 이러한 사실을 술자리에서 떠들어댔고, 사정을 알지 못하는 성주 목사는 “그놈 진짜 수컷 맞느냐”며 웃어댔다. 이문건은 이 일로 인해 심사가 편치 않아 한동안 술자리나 연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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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년설이 채택되어 서인 정권이 몰락하고 남인 정권이 성립하게 된다. 장렬왕후는 1688년(숙종 14) 64세를 일기로 창경궁 내반원에서 사망했다.
시호는 자의공신휘헌강인정숙온혜장렬(慈懿恭愼徽獻康仁貞肅溫惠莊烈)이다. 능호는 휘릉(徽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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