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까지 난설헌은 조선 제일의 여성 문인이라는 찬사와 함께 중국 시인들의 시를 표절했다는 시비에 휘말려 있다. 그러므로 진지한 사료 비판에 근거해서 생애 및 작품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1506년 겨울 연산군은 왕위에서 쫓겨난 지 두 달 만에 유배지 강화도 교동에서 세상을 떴다. 왕의 여자로 살던 장녹수도 연산군이 몰락하자마자 파국을 맞이했다. 연산군이 유배를 떠난 날에 장녹수의 참형이 결정되었다. 5~7년여 동안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 후 맞이한 비극적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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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이 될 만한 남자가 드물어서 홀로 살았지만 태연자약하였다’거나 ‘홀로 살았지만 즐거워하였다’는 등의 표현이 있어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왕씨는 43세가 되던 1183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처녀 왕씨의 존재는 조선시대와 또 다른 전통이 우리에게 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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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군부인은 고려의 문화와 국력이 크게 성하였던 시절,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좋은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부덕을 갖춰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다했으며, 그 결과 남편과 자식들이 크게 성공하였다. 그녀는 1170년 6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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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네 명으로 당재(唐宰), 당주(唐柱), 당준(唐俊), 당필(唐泌)이 모두 벼슬하여 높은 관직에 올랐다.
평량군부인은 고려시대 청빈한 삶을 영위하려 애쓰던 관료의 삶, 그리고 그 아내의 내조를 잘 보여준다. 아울러 불교를 독실히 믿고, 가정 경영의 주체이던 여성의 모습 역시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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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를 ‘원덕태후’라고 하고, 곤릉(坤陵, 인천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75, 사적 제371호)에 안장하였으며, 1253년에 정강(貞康)이라는 시호를 추가하였다. 원덕태후의 삶은 고려 무신집권기 왕실의 수난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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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후는 1222년 사망했다. 능을 진릉(眞陵), 시호를 선정태후(宣靖太后)라 하고, 뒤에 신헌(信獻)이라는 시호를 추가하였다. 그녀는 시련 속에서도 왕비 및 태후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은 여성이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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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 부인의 혼이 새가 되어 그 동굴에서 조금씩 쌀을 흘려보낸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당시 신라 사람들은 대의를 위해 목숨을 버린 제상보다 남편을 향한 애통함에 애간장이 녹아나던 치술부인의 심정에 더 공감하였다. 신라인들의 공감과 바람 속에서 치술부인은 치술신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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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노는 온조왕 13년(B.C. 6)에 61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처럼 소서노는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였을 때는 왕비로서, 아들인 비류와 온조가 백제를 건국하였을 때는 왕의 어머니로서 큰 기여를 하였다. 소서노는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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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를 통해 신라의 불교가 전통신앙의 기반 위에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는 점과 함께 그 주체적인 역할을 여성이 담당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비구니 사씨의 존재는 신라 여성의 사회문화적인 전통에서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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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심에 아도의 어머니인 고도령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신라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래된 일화는 고도령이 아도를 낳고, 출가시키고, 신라에 보낸 것에서 시작하여 고도령의 예언으로 끝맺고 있다. 신라에 불교를 전래한 주역은 아도 이전에 그의 어머니인 고도령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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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을 출간하였으며, ‘여성전진 70년-초대 여기자의 회고’ 등 그의 수많은 저서들이 근대 여성사 연구의 견고한 디딤돌이 되고 있다. 1984년 별세 후 조선일보사는 그의 유지에 따라 ‘최은희 여기자상’을 제정, 후배 여기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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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독립운동가 가족의 일원으로, 넓게는 임정 관련 요인들과 가족, 나아가 임정의 일원으로 항일투쟁 독립을 위해 자신을 불살랐다. 1991년 귀천하기까지 그의 투철한 애족·애국정신은 자녀와 후손, 후배 여성들에게 귀감이 되어 새겨지고 이어지고 있다 하겠다. 198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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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서 민족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한편 쌀 투쟁 등 민생고 해결에 앞장섰다.
1947년 미 군정의 탄압이 거세지자 월북하여, 여성과 노동자의 살 길을 찾아보고자 했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 고위직에 있다가 1962년 고령으로 요양소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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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대동강에 뿌려졌다. 일생을 공부와 항일 민족운동에 헌신한 그의 정신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지금까지 빛을 발한다. 열정적인 꿈을 당당하게 실현하는 데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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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내지도 뽐내지도 않으며, 묵묵히 역할을 다한 그의 모습은 진정 자신을 아름답게 하였을 뿐 아니라 동료를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기독교에서 불교로, 사회주의로 자신의 뜻에 따라 거침없이, 그러나 중심을 잡아 일말의 흐트러짐 없이 일생을 살아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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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家煥)도 “만덕은 제주의 기특한 여인일세/예순 얼굴이 마흔쯤으로 보이는구려” 하는 시를 지어주었다. 1840년 제주에 유배 온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도 큰 글씨로 ‘은광연세(恩光衍世·은혜의 빛이 세상에 퍼지다)’라 써서 그 후손에게 주었다. 기부가 가져온 사회와 역사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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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 씻어야지/달 지면 다시 나가/씻어둔 호미 다시 잡고 호미질해야지!”라는 시구처럼 척박한 현실을 위로하는 방도였다. 그러면서 “몇 칸 초가집 맑고 깨끗하니/책상에서 책읽기 좋아라”처럼 독서하는 삶을 지켜냈다. 진정한 자존의 길은 바로 자기 안에 있음을 일깨우는 삶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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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바느질도 못할 정도로 몸져누워 있을 때 아들이 몰래 가져다준 책을 읽고 시름을 잊을 만큼 책을 사랑했다. 여성의 ‘직분’을 위반하지 않으면서도 책 읽기를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마치 단단한 바위 틈새를 비집고 나온 여리지만 강인한 풀처럼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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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이나 딸에게 조신한 처신을 요구한 양반 남성들은 기녀를 통해 성적 만족감을 얻었다. 이런 양반이 기녀 절개를 기리기 위해 묘표를 지었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라 할 수 있다. 한계의 자결이 헛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되돌릴 수 없는 한계의 자결이 못내 안타깝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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