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명백히 하였으니, ‘삼강행실(三綱行實)’에 수록된 열녀라도 이보다 낫지는 않습니다. 마땅히 정표하여 풍화(風化)를 닦아야 합니다”라고 건의하였다. 숙종은 건의를 받아들여 향랑을 정녀(貞女)라 부르고 무덤 옆에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이로써 향랑은 열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개가가 문제되지 않는 하층민 신분임에도 투철했던 우열녀의 수절 의지는 17세기 후반에 이미 양반층 여성의 열(烈)의 윤리가 서민층 여성에게까지 보급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영발은 승낙을 받지 못하자 가족과 친족, 이웃까지 협박하였다. 아버지 막복과 이웃사람들은 곤경에 처하였다. 결국 우열녀는 청혼을 승낙하고 영발의 집으로 갔다. 그러나 마당에...
정토는 석가모니불의 영산회상(靈山會上), 미륵불의 용화회상(龍華會上) 등 다양하나 일반적으로 아미타불의 서방정토를 칭한다. 당시 아미타신앙이 유행했음과 더불어 여성들에게 출가란 부처가 되기 위함보다도 극락왕생의 방편이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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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한 세대가 지났을 뿐인데도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강조되면서 여성의 정조에 대한 관념이 한층 강화되었던 것이다.
한편 신씨의 언니는 낭장(郞將) 김우현(金遇賢)의 아내이다. 고려 말에 왜적이 침범하였는데 김우현이 도망쳐 숨었다. 감군(監軍)이 신씨에게 남편이 있는 곳을 묻자 그녀는 “상을 탈 일이라면 가르쳐 주겠지만, 죄를 주려고 묻는 바에야...
감정이겠으나 계국공주는 고려의 왕위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원나라 공주였다는 점에서 정치적 파장이 컸다. 그녀는 ‘왕이 공주와 결혼한 뒤 부부관계를 꺼렸다’고 사료에 언급될 정도로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고귀한 신분이었으나 여성으로서는 매우 불행한 삶을 살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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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왕비를 단지 질투에 의해 죄인으로 만들어 폐비하고, 심지어 원나라 남자와 결혼까지 시켜버렸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약소국의 비애라 해야 할까? 조비는 고려왕조 5백년간 가장 불행한 왕비 중 한 명이었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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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단(白也丹·?~1297)은 충렬왕의 후궁이다. 태산군(泰山郡·현 전북 정읍) 사람인 시씨(柴氏)의 딸로서 처음에 궁인으로 입궁하였다. 일명 무비(無比)라고도 불리는데, 무비란 비교의 대상이 없다는 뜻이니 매우 아름다웠을 것이다. 예전에 의종(毅宗)의 궁인에도 무비가 있었는데, 그녀 역시 미모로 왕의 사랑을 받은 바 있다. 백야단을 무비라고도 부른 것은 미색과 왕의...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노비 반란을 주동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 노비는 생살여탈(生殺與奪)이 주인 손에 달려 있던 ‘살아 있는 재산’이었다. 그들의 꿈은 양인이 되는 거였고, 평량의 처는 신분제의 동요와 함께 그 꿈을 실현하려 하였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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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죽은 이후 비빈(妃嬪)들의 삶은 어떠할까. 수원 권씨는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절에서 거주하며 명복을 비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왕의 죽음과 관계없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이는 그에게 또 다른 삶의 의미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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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정이라는 궁궐 안의 우물이었는데, 김정란의 이름이 뜻하는 의미 역시 우물과 난초의 향기이다. 김정란과 묘정이 동일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유이다. 김정란에 대한 사람들의 동정과 관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설화로 전한 것일까. 역사적 사실과 설화의 경계에 김정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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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은 또한 ‘삼국유사’에는 숙명(夙明)이라고 기록돼 있는데, 동일 인물이다.
소성왕은 신라 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의 장손이다. 원성왕은 맏아들 인겸(仁謙)을 왕태자로 책봉하였으나 일찍이 죽고, 이후에 아들 의영(義英)을 태자로 삼았으나 그 역시 일찍 유명을 달리했다. 이에 원성왕은 인겸의 아들인 준옹(俊邕)을 태자로 삼았고, 준옹은 원성왕이...
삶과 죽음은 누구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성목태후가 살아서 태후의 지위를 누렸다 하더라도 아들과 손자 간의 왕위 쟁탈전에 평안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성목태후의 이른 죽음이 마냥 안타깝지만은 않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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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건립과 탑의 조성을 통해 간절히 바랐던 것은 살아 있는 이의 복과 죽은 이의 명복이었다. 간절한 기원의 끝에는 선업(善業)을 쌓아 성불(成佛)하고 부처님이 계신 이상 세계인 불국토(佛國土)에 가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 불국토를 꿈꾸는 것은 누구에게나 허용되는 자유였고, 평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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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은 나에게 20년 동안이나 마음 아픈 일이었다.”라고 하였다.
대야성 전투는 나당연합과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발해와 통일신라의 남북국 성립으로 이어지는 소용돌이의 서막이었다. 고타소랑의 죽음은 그 결정적 계기였고, 명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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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락의 친인척 중 정부가 추서한 독립운동가는 무려 25명이나 된다. 사진 한 장 변변히 남기지 못한 그는 아내로 며느리로 어머니로 누이로, 그가 처한 자리에서 가족과 함께 항일투쟁에 열과 성을 다한 여성독립운동가다. 2001년에 추서된 건국훈장 애족장이 작으나마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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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남편과 결별, 조선 여성의 조직화와 중국 여성들과의 통일전선에 앞장섰다.
1938년 충칭(重慶)을 거쳐, 1939년 3월 구이린(桂林)으로 가 조선의용대 여자복무단의 부대장으로 무장 항일투쟁에 참가하였다. 김학철, 허정숙 등과 함께 적의 진지 바로 앞에서 ‘염전반전(厭戰反戰)’ 선전에 힘쓰고, 가극 공연, 포로 설득과 의용대 입대 권유 등에 헌신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 1995년에 ‘역사의 수레를 끌고 밀며-항일독립운동과 백산 지청천 장군’을 저술·발간하였으며, 2007년 운명하였다. 2015년 아들 이준식이 정리한 ‘민들레의 비상’으로 우리에게 다시 그의 빛을 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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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남[越南]인 묘지에 안장됐으나, 지금은 무덤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는 조마리아에 대해 “너그러우면서도 대의에 밝은 분이었다”고 회고하였다.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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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이예순은 왕실 비구니원인 자수궁에 머물렀고, 광해군 부인 유씨와 김개시 등의 왕실 여성들로부터 생불로 칭해질 정도로 깊은 신망을 얻었다. ‘연려실기술’에는 “예순이 궁중에 출입하니 대궐 안 사람들이 모두 생불이라 일컬으며 신봉함이 비할 데 없었다”고 기록돼 있다. 특히 김개시와는 모녀지간을 맺을 정도로 친분이 돈독했다.
하지만 이예순은...
신씨는 재산의 절반을 절에 시주할 정도로 평생토록 불사와 신행에 열중하였는데, 이는 유학자 관료들로부터 끊임없이 지탄을 받았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없이 평생토록 불교계의 대화주(大化主)를 자처했고,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보시와 회향(廻向)으로 극복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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