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초에는 경성여자청년동맹 창립 등으로 사회주의 여성단체의 핵심 인물로 자리 잡아갔다. 1927년의 신간회 참여와 동시에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전국을 누비며 여성의 사회 의식화, 빈민 구제 등 활동의 폭을 넓혀 갔다.
1929년 8월 경성여자소비조합 이사도 겸하였으나, 근우회가 해체되면서 1930년대 들어 항일 활동이 주춤할 때는 신문구독 권유원으로 생활...
조선 역사를 통틀어 경제적으로 성공한 여성을 꼽는다면 단연 김만덕(金萬德· 1739~1812)을 들 수 있다. 1739년(영조 15) 제주에서 태어난 만덕은 10여 세에 부모를 잃고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자 어느 기생의 수양딸로 들어갔다. 만덕이 나이가 조금 들자 관아에서 그 이름을 기생 명단에 올렸다. 기생은 천인이었다. 만덕은 스물이 넘자 본인이 양인임을 관아에 호소해...
혼인 첫날 밤 꽤 파격적인 풍경을 연출한 이 여성이 김삼의당(金三宜堂· 1769~1823)이다. 삼의당은 본관이 김해이며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학자 김일손(金馹孫·1464~1498)의 11대손인 김인혁이다. 18세에 같은 마을에 사는 동갑내기 하립(河砬·1769~1830)과 혼인했다. ‘삼의당’이라는 당호는 남편이 지어준 것이다.
삼의당은 “배우지 않으면 사람다울 수...
하지만 여성 본분에 어긋난다 하여 직접 손으로 시를 쓰지 않았다. 남편이 아들들을 시켜 옆에서 몰래 적게 했다. 그래서 다행히 시 191수와 사(辭) 1편이 남편 시집인 ‘족수당집(足睡堂集)’에 남게 되었다. ‘영수합’도 남편이 지어준 당호인데 ‘수(壽·목숨)’자를 넣은 것은 허약한 아내를 위한 배려였는지도 모른다.
3남 2녀를 둔 영수합은 자녀 교육에 큰 열정을...
조선 중기에 동래 정씨 집안에서는 걸출한 인물 세 명이 동시에 나왔다. 정태화(鄭太和), 정치화(鄭致和), 정지화(鄭知和)가 그 주인공이다. 당시 조선은 정씨가 움직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모두 정승까지 올랐다. 이런 명문가에서 소실을 위해 묘표(墓表)를 세웠으니 그 주인공은 의로운 여성이라 불리는 한계(韓係, 1643〜1669)다.
한계는 정치화(1609〜1677)의 소실로...
김호연재(金浩然齋·1681~1722)는 여성의 자존감을 거침없이 드러낸 ‘자경편(自警篇)’이라는 글을 남긴 여성이다. 본관은 안동이며 강원도 고성 군수를 지낸 김성달과 어머니 이옥재(본관 연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4남 4녀 중 딸로서는 막내였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이 고조부다.
호연재 가족들은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시집을 엮을 만큼 문학을...
혼인 시 가져간 여성의 재산은 시가의 재산으로 흡수되지 않았으며, 여성 자신에게 관리와 처분권이 있었다. 만일 여성이 죽으면 소생 자녀에게 상속되고, 자녀가 없을 경우에는 친정에 귀속되었다. 철저한 부부별산제(夫婦別産制)로, 만일 남편과 아내가 사찰에 시주를 할 경우 남편과 아내의 재산을 구분하여 기록할 정도였다. 고려시대의 여성들은 자기의 재산으로...
어머니 심지의(沈志義)는 의령군대부인 심씨(宜寧郡大夫人 沈氏)로 부덕이 있는 여성이었다. 염경애는 4남 2녀 중 맏딸이었는데, 아름답고 정숙할 뿐 아니라 글을 알고 대의(大義)에 밝아 말이나 행동이 남보다 뛰어났다고 한다.
염경애는 25세 때 수주(水州·수원) 최씨인 최루백(崔婁伯)과 혼인하였다. 시가는 대대로 수원의 향리를 지낸 집안이었다. 왜 이렇게 기우는...
우리는 흔히 전근대 시대에는 여성이 천시되어 이름조차 없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생각이다. 여성의 이름이 애초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쓰일 일이 없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을 뿐이다. 예컨대 ‘삼월이’, ‘오월이’ 등 오히려 노비의 이름은 많이 남아 있다. 노비는 특수한 신분층으로 국가의 관리를 받았기 때문에 여성이라도 노비적...
사기는 고위 관료나 권세가 등이 노래와 춤에 능한 여성들을 자기 집에 두고, 개인적인 연회나 손님 접대 등에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최충헌은 가병(家兵)들에게 수시로 전투 연습을 시키고는 집의 기생들을 마치 선녀가 승리를 축하하러 온 것처럼 연출시켜 즐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기생의 신분은 천인이었고, 노래와 춤뿐 아니라 술자리의 흥을 돋우기...
장경왕후는 고려시대 가장 귀한 여성 중의 한 명이었다. 왕가의 여성으로 태어나 태자비가 되고, 왕비가 되고, 태자를 낳았다. 남편은 24년간이나 재위했다. 그러나 행복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쿠데타로 남편이 쫓겨나고 아들도 추방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와 여동생 두 명이 모두 인종의 아들과 혼인했다는 점이다. 무신란이 터지면서 그녀의 남편 의종이...
그중에 가야 멸망 무렵 이뇌왕(異腦王)의 왕비가 된 여성이 주목된다. 이 왕비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다양한 사료에 등장하고 있으며, 가야와 신라의 외교 분쟁에 중심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후대 신라와 가야 역사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었다.
가야 이뇌왕비는 가야 출신이 아니었다. ‘삼국사기’에는 이찬(伊飡) 비조부(比助夫)의...
아로는 이 아루부인과 같은 인물이면서도 남해차차웅과 남매 관계에 있다고 하였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아로는 왕의 딸로 태어나 왕의 누이, 혹은 왕비로 살았으니 계보상으로만 보더라도 최상층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로는 단순히 계보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전근대 대부분의 여성들은 왕의 어머니나 아내, 혹은 딸로서 계보상의 존재로만...
신라에서 왕실 여성들은 대부분 근친혼을 하였는데, 왕녀인 명원부인 역시 왕실 전통에 따라 외삼촌과 혼인을 한 것이다. 여자형제로 미추(味鄒)이사금과 혼인을 한 광명부인이 있다.
남편 석우로는 대장군에 임명되었고, 각간으로 승진하여 군사 업무를 총괄하였다. 우로는 전쟁터에서 손수 불을 피워 부하들을 위로하여 존경을 받았으며, 포상팔국(浦上八國)의 난을...
공주로서는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위덕왕의 안위(安慰)에 대한 기원도 했을 것이다. 정략의 희생양으로 적국인 신라로 가서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후궁으로 살아야 했던 다른 여형제에 대해서도 부처님의 가호에 기댈 수밖에는 없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문헌기록에 행적을 남긴 고구려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낙랑국 출신의 공주라고 해서 이름처럼 불리고 있는 것이다. 공주의 아버지는 낙랑국의 왕 최리(崔理)이다. 낙랑국의 공주가 고구려 역사에 존재를 남기게 된 것은 고구려 왕자와 혼인을 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왕자 호동이 남쪽으로 여행을 갔다가...
그 뒤 ‘목요시’ 동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여성문학인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고, 시집으로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실락원 기행’(1981), ‘이 시대의 아벨’(1983), ‘여성해방출사표’(1990), ‘광주의 눈물비’(1990) 등을 출간했다.
고정희가 여성주의 문인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사회 변혁과 민주화를 지향하면서도 여성문제를 독자적인 문제...
영국, 중국, 일본 등 해외 공연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10년에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판소리 1인 창무극 심청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사회적 약자들의 삶에 눈감지 않고 그것을 예술무대에서 재현하고자 했던 최고의 춤꾼 공옥진은 2012년에 생을 마감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또순이’(박상호 감독, 1963)에서는 생활력이 강한 월남여성 또순이를 연기했는데, 함경도 사투리를 잘 소화했다는 평을 받으며 아시아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한국 공포영화의 고전으로 불리는 ‘목 없는 미녀’(이용민 감독, 1966)와 ‘월하의 공동묘지’(권철휘 감독, 1967)에도 출연했다. 당시 선전포스터에서 “혈관이 얼어붙는 끔찍한 공포”라고...
1949년 여성 최초로 서울대 법대를 나온 이태영은 1952년 고등고시에 합격해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되었다.
이태영이 변호사가 될 무렵, 새로운 가족법(민법의 친족·상속편)을 제정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광복 후 미군정은 창씨제도를 비롯해 일제의 악법을 폐지했지만, 민법은 새로운 법을 제정할 때까지 법적 효력을 유지시켰다. 이에 새로운 민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