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시바, 시베리아', 혹한의 땅에서 부르는 희망 노래 [서평]

입력 2014-09-05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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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37도. 시베리아는 혹한의 땅이다. 시베리아를 떠올리면 희망보다 어둡고 외로운 면이 먼저 다가온다. 하지만 ‘스파시바, 시베리아’ 저자 이지상은 다르다. 20년을 음악인으로 살아온 그는 시베리아에서 희망을 노래한다. 얼굴이 얼얼하고 코끝이 마비될 정도의 추위와 눈보라가 온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지만 혈관 구석구석 쌓여 있는 독소들이 치유되고, 수십년간 쌓여온 삶의 잡상들이 깨끗이 씻겨나가는 기분이다. 혹한의 고통이 상쾌함이 되는 순간, 시베리아 이르쿠츠크에 위치한 바이칼 호수는 활력을 전해준다.

세계 민물 양의 20%,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이 1637m로 서해 바다보다 깊은 바이칼 호는 시베리아의 생기와 삶, 인생 철학을 담고 있다. “거대한 절벽에 서면 하늘빛과 물빛이 닮았다”는 저자의 독백에서 볼 수 있듯이 바이칼 호의 장대한 자연은 분단의 현실에 처한 우리 민족의 현 상황도 고찰하게 한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호수의 백사장에서 일광욕을 즐기는가 하면 한기로 가득한 호수에서 태연한 듯 헤엄치는 모습은 ‘여유’가 무엇인지 몸소 말해주고 있다. 세계 최대의 담수량을 자랑하지만 물 한 컵 받아 양치하고 바가지로 끼얹어 샤워하는 겸손함도 호수가 가진 절대적 풍미의 한 부분이다.

즈나멘스키 사원의 기도는 진솔하다. 일흔이 넘은 한 여인의 간절한 기도는 스스로의 기도가 무엇이었는지 돌아보게 한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소서.” 여인의 기도는 욕심이 없어 작고 숭고하다. 예수의 기도와 닮아있다. 마치 선율과 같은 그들의 기도를 듣고 있자면 시베리아가 주는 평화가 드디어 몸을 휘감는다.

발콘스키의 집에서 다산 정약용을 생각하게 했던 시베리아 동토에는 추운 곳에서 고독하게 살고 있는 우리의 역사가 있다. 70년째 이역의 땅 스타라야 마기라를 배회하는 홍범도, 안중근이 여순 감옥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보호했던 최재형, 한인 최초의 볼셰비키 일생을 민중을 위해 살다 간 조선 처녀 김알렉산드라, 한인 사회당의 당수 이동휘, 조국의 독립을 외치며 홀로 운명한 이범진, 최고려, 이인섭,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파의 거두 오하묵까지... “잊힌 이름들은 이 숲에 잠들어 있다”는 말을 증명하듯 이르쿠츠크 자작나무 숲 사이로 눈발이 흔들린다.

9288km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러시아의 삶을 싣고 달린다. 창밖 풍경은 시리지만 마음을 지날 땐 언제나 포근했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열차는 사람냄새를 듬뿍 싣고 달리며 마치 영화 ‘설국열차’를 구현해 놓은 듯하다. 열차 안의 인간 군상과 68개 역 곳곳에 진하게 자리한 러시아의 정취가 호기심으로 다가온다.

1637m의 심연 하보이 곶부터 모스크바 젊음의 거리 아르바트까지 러시아는 그야말로 “스파시바(고맙습니다)”를 외치게 한다. 저자가 우수리스크 시장에서 만두를 살 때 넉넉한 풍채의 아주머니에게 들은 ‘쓰파씨~바’는 좀 더 센 억양이었다. 시베리아의 고마움과 상스러움이 묘한 카타르시스를 형성한다.

“이 원고에 마침표를 찍으면 미리 쌓아둔 짐을 들고 나는 시베리아로 간다. 여름 시베리아의 추억은 생각만 해도 미소가 번지는 내 삶의 활력소였다. 두근거리는 가슴은 어쩔 수가 없다.” 이루쿠츠크 주 정부 청사 앞 키로프 광장의 얼어붙은 풍경과는 다른 러시아인의 환한 미소에서 볼 수 있듯이 시베리아는 야누스의 얼굴 같다. 40도에서 75도의 보드카를 생명의 물로 마시는 독한 곳이지만 누구보다 독한 삶을 살고 있는 한국인에게는 “스파시바”를 외칠 수 있는 여유를 던져주는 곳이다. 2011년 여름부터 해마다 시베리아로 떠난 저자의 '기행'이 더 이상 생소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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