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저리 치이는 중견기업…'산업계의 허리'가 휜다

입력 2012-09-03 11:44 수정 2012-09-03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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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활로, 중견기업서 찾는다]①대·중소기업 사이에 낀 '샌드위치'

#지난해 2026억원 매출을 달성하며 국내 대표 중견기업으로 우뚝 선 바른전자. 낸드플래시 기반 패키징업체인 이 회사는 지난해 말 아찔한 순간을 겪었다. 주 고객사인 해외기업 L사가 바른전자의 제품이 좋다면서 공급량을 대폭 늘려줄 것을 갑자기 요청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른전자는 물량확대를 위한 설비투자 자금이 부족했다. 더군다나 L사는 “바로 물량을 늘리지 않으면 다른 회사 제품을 쓰겠다”고 엄포까지 했다. 마음이 급해진 바른전자는 부랴부랴 국내 은행들에게 자금지원을 요청했지만 은행들은 바른전자의 기술력과 잠재력 대신 담보와 이자 만을 따지며 대출을 꺼렸다. 많은 기술보증제도들도 있었지만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한 자금지원이 대부분이어서 중견기업인 바른전자가 낄 자리는 없었다.

바른전자 설명환 커뮤니케이션팀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막판에 한 외국계 은행의 지원으로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었지만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가뜩이나 한번 망하면 재기하기 어려운 우리나라 산업환경으로서는 중견기업을 위한 지원이 너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중견기업은 대기업과 중견기업 사이를 잇는 ‘산업계의 허리’다. 산업계 허리인 만큼 중견기업이 튼튼해야 국가 경제력도 향상된다.

하지만 국내 중견기업들이 처한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좋은 말로 산업계 허리로 불지지만 다른 한편으론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낀 ‘샌드위치기업군’이기도 하다. 그만큼 정부와 사회의 인식이 대기업과 중소기업에만 쏠려 있고 정작 중견기업을 위한 지원이나 정책은 찾기 힘들다.

앞서 언급한 바른전자의 일화도 중견기업을 위한 지원이나 혜택의 부족을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예다. 중견기업 A사 관계자는 “그동안 중견기업은 개념 자체도 모호했고 상대적으로 중소기업에 비해 존재감이 떨어져 정부의 정책적 관심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자금지원은 많은데”… 중견기업은 거의 없어 = 우리나라 중소기업은 ‘피터팬 증후군’을 앓고 있다.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을 거부하는 현상이다.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편입되면 기존 중소기업 지원 및 혜택 등을 누릴 수 없게 된다. 중견기업 만을 위한 지원도 아직 드물다. 중소기업으로 남아 정책적 혜택을 누리고자 하는 중소기업들이 아직도 많은 이유다.

중견기업 B사 관계자는 “여러 기술보증제도들이 많지만 중견기업들이 활용할 만한 것들이 별로 없다”면서 “중견기업들은 설비투자 등을 적극적으로 해서 앞으로 치고 나가야 하지만 기술담보가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투자에 소극적일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 기술보증기금의 자금 지원은 대부분 중소기업 위주여서 중견기업들이 자금 지원을 받기는 하늘의 별따기라는 표현까지 나올 정도다.

지식경제부 성장촉진과 진수훈 사무관은 “기술보증기금은 대부분 중소기업에 해당하고 운용 기준도 중소기업 위주로 돼 있어 중견기업은 거의 혜택이 없다”고 설명했다.

지경부에 따르면 중견기업들이 그나마 가장 많이 활용하고 있는 것은 정책금융공사의 온랜딩(On-lending)이다. 온랜딩은 은행권 대출이 힘든 중소·중견기업들을 위해 정책금융공사가 은행에 돈을 지급, 해당 기업들에게 간접 대출해주는 시스템이다.

진 사무관은 “1년에 대략 4조원의 자금이 나갈 정도로 정책금융공사에서 가장 크게 벌이고 있는 사업이지만 아직까지 중견기업 기준으로는 거래가 크게 활발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KB금융그룹과 대한상의가 지난해 10월 공동 개최한 '2011 KB굿잡 중견·중소기업 취업박람회'에 취업준비생들이 이력서 컨설팅을 받고 있다.(사진=뉴시스)
◇대기업에도 치이는 중견기업의 현실 = 대기업들에게는 더 많이 치인다. 특히 사회간접자본 등 정부 발주 사업에 있어서 대기업들에게 밀리는 경우가 많다. 보통 공공 발주는 공고기간이 대략 한 달에서 세 달 정도인데 이 기간 동안 대기업들과 중소기업이 준비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출발선상부터가 다르다는 게 중견기업계의 항변이다.

중견기업 C사 관계자는 “자금력과 인력이 막강한 대기업들은 하루 만에 준비해야 할 것을 중견기업들은 몇 달이 걸리니깐 준비 과정서부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면서 “차라리 공공사업에 있어선 사전 발주 예고제 같은 게 시행되면 중견기업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중견기업을 향한 대기업들의 견제도 한 몫을 한다. 중견기업계에 따르면 30대 재벌기업들은 지적재산권을 빼앗거나 인수합병(M&A), 물량공세 등을 통해 중견기업의 성장을 견제한다고 한다. 밑바닥에서부터 성장해온 중견기업의 내공과 노하우를 무시하지 못해서다. 이에 중견기업인들 사이에선 “대기업의 1위는 절대 바뀌지 않지만 중소·중견기업의 1위는 언젠가는 바뀔 수밖에 없다”라는 자조 섞인 얘기도 나온다.

D중견기업 관계자는 “실제 과거 중견기업 시절 웅진도 처음 유통업계에 기반을 닦을 시 대기업 식품업체들의 제품가 인하를 통한 물량압박 등 전방위 견제를 받기도 했다”고 언급했다.

핵심 인력도 대기업들에게 빼앗기는 경우가 많다. 실제 중견기업연합회 설문조사에 따르면 중견기업들이 가장 큰 애로요인으로 꼽은 건 ‘전문 인력의 확보(38.1%)’다. 검증된 중견기업 인력을 대기업들이 마음먹고 빼 가면 막을 도리가 없다.

합성수지를 생산하고 있는 중견기업 한국엔지니어링플라스틱도 이 같은 인력확보 문제를 가장 큰 애로점으로 꼽고 있다. 한국엔지니어링플라스틱 관계자는 “우리 업계에서도 대기업 경쟁사가 인재들을 많이 빼가는 경우가 많지만 대기업을 상대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면서도 “또한 인재들이 자진해 이직하는 것을 막을 수도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대기업의 인재 빼가기도 문제지만 대부분 인재들이 자진해 대기업 이직을 원하는 것도 문제다.

중견기업연합회 유영식 이사는 “사회적인 인식 자체가 대기업 위주로 쏠려있기 때문”이라며 “이 같은 분위기가 너무 만연해 근본인 중견기업의 인식 자체부터 제고해야 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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