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대학은 미래다]취업률·논문수…실적평가 '숫자의 감옥'에 갇힌 대학

입력 2012-02-03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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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시장화' 거센 파고-연구·교수 대학 본연 기능 잃고 퇴출 압박에 '영업실적' 경쟁만

▲정부가 취업률을 잣대로 대학에 순위를 매기면서 각 대학들이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사진은 청주소재 C대학이 이 학교 음악교육과 졸업생들에게 보낸 서한. 이 서한에는 "음악학원과 개인레슨을 통해 얻은 소득을 국세청에 신고해 달라. 또는 소득의 3.3%를 세금으로 낼 수 있는 분은 조교에게 연락해 달라" 등의 내용이 적혀 있다.
“2011년 2월과 2010년 8월 졸업생의 취업률을 제출하라는 교육과학기술부의 공문이 각 대학에 내려갔다. 위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최대한 지표를 높게 맞추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일주일간 집에 못 들어갈 정도로 매달렸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그런데 교과부 공문 내용이 바뀌었다. 2011년 8월과 2012년 2월 자료를 달라고 했다. 다시 같은 일주일을 보냈다”

서울의 한 사립대 교직원는 지난해 정부에 취업률 자료를 제출할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언뜻 생각하면 어려울 것도 없는 단순 행정업무다. 전체 졸업생 가운데 취업자가 몇 명인지 센 후 적어 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일주일간 집에도 못 들어갈 만한 내용이 아니다.

대학은 숫자에 갇혔다. 정부의 구조조정 칼바람이 지나가면서 대학들은 ‘숫자 높이기 전쟁’에 매진하고 있다. 대학들이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편법적인 ‘꼼수’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대학이 기업화되고 있는데 정부 평가까지 겹치며 학교가 평가에 매몰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학문의 탐구라는 대학 본연의 기능이 약해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대학는 취업률 숫자에 갇혔다=숫자를 통한 평가는 낯선 모습이 아니다. 홍승용 대학구조개혁위원장은 대학구조개혁과 관련해 ‘측정할 수 있어야 경영할 수 있다’는 일반원칙을 여러 차례 강조하기도 했다. 정부가 양적 기준으로 대학을 평가한다는 선언인 셈이다. 정부는 지표를 바탕으로 각 대학에 대한 지원금을 제한하는 한편 부실대학을 선정해 발표하고 일부를 퇴출시켰다.

대학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취업률만을 늘렸다. 경기도의 A 대학 재학생에 따르면 이 학교에서는 지난 해 말 갑자기 조교를 50명이나 대폭 확충했다. 두 달짜리 계약직이다. 학교는 아직 취직이 되지 않은 졸업생 또는 졸업예정자에게 개별적으로 연락해 두 달간 조교로 일할 것을 종용했다. 이들은 해당기간 4대보험에 가입이 됐다. 이렇게 학교는 이들을 ‘취업자’ 범주에 넣었다.

‘유령 직원’을 만들어내는 일도 많다. 교수가 운영하는 회사나 지인의 회사에 학생을 서류상으로만 직원으로 등록한 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신고하는 방법이다. 최근 부산의 한 전문대학 교수가 학과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학생들에게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졸업생들을 지인 업체 직원으로 등록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유령회사'를 만들어 학생들이 취업한 것처럼 속이는 경우도 있다.

◇연구없는 연구실, 학문없는 도서관, 수업없는 강의실=학교가 취업률로 평가를 받는 것처럼 교수들도 연구논문의 숫자로 성과평가를 받는다. 학생은 취업에서 자격증 숫자와 어학점수로 평가를 받는다. 교수와 학생이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교실에서 제대로 된 수업이 사라지는 부작용도 발생한다. 학문을 연구해야 할 연구실에서는 ‘논문 쪼개기’ 등의 편법도 동원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대학 교수들 사이에서는 “논문을 쓰느라 연구할 시간이 없다”는 자조섞인 우스갯소리도 돌고 있다. 형식적인 논문을 쓰는 기계적인 업무때문에 ‘진짜 연구’를 할 시간이 없다는 것. 이로 인한 부작용이 당장 수업에서도 나타난다. 교수들이 논문 작성에 급급하다 보니 강의 준비도 뒷전이 되기 십상이다.

서울 M대학 경영학과 4학년 오모(28)씨는 대학교의 수업에 대해 “교수들이 학생에게 수업을 떠넘기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바쁜 교수들이 발표수업만 선호하거나 몇 년째 같은 커리큘럼으로 진행하는 등 수업의 질이 떨어지는 현상이 벌어진 탓이다. A대학교 시간강사 박모(38)씨는 “발표수업은 본래 취지와 다르게 교수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방향으로 변질된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올해도 ‘숫자감옥’ 탈출 어려울 듯=대학들은 올해도 정부의 평가지표를 맞추기 위한 노력에 부심해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 대학구조개혁위원회는 지난달 17일 전체회의를 열고 강도 높은 구조개혁 지속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특히 올해도 2~3개 대학을 퇴출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개혁위는 정보공시 지표를 부풀리거나 허위로 작성한 대학은 정부재정지원 사업에서 불이익을 주기로 했다. 하지만 생존이 걸린 ‘죄수의 딜레마’ 속에서 대학들이 순진하게 대응할지는 미지수라는 게 대학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아울러 교과부는 당장 올해부터 국공립대 교수들에게 성과급적 연봉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성과급적 연봉제는 교수의 성과에 따라 급여를 차등지급하는 방식으로. 교수들은 적게는 수백만원에서 많게는 억대에 이르기까지 연봉에 차이가 생기게 된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연구 때문에 수업과 연구가 뒷전이 되는 강의현실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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