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후] 생산적금융의 무게를 짊어진 은행들

입력 2026-05-1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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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타기 곡예사는 무조건 빨리 걷지 않는다. 발밑을 확인하고, 몸의 균형을 잡고 한 걸음씩 내딛는다. 서두르다 떨어지면 다시 올라오기가 훨씬 힘들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지금 은행권이 딱 그 자리에 서 있다.

정부는 '생산적 금융 대전환'을 선언했다. 가계대출과 부동산에 묶였던 돈을 기업과 혁신산업으로 돌리겠다는 것이다. 부동산에 쏠린 돈의 흐름을 바꾸지 않고서는 한국 경제의 다음 성장판을 열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출발했다. 맞는 말이다. 반도체, 인공지능(AI), 바이오 등으로 돈이 흘러가야 성장의 씨앗도 자란다. 정부가 은행·보험업권 자본규제를 완화해 총 98조7000억원의 추가 자금 공급 여력을 만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은행들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연말 조직개편에서 생산적 금융 전담 조직을 신설하고 기업금융 담당 인력을 보강했다. 정책 방향에 발을 맞추려는 의지는 분명하다. 실제로 올해 1분기 가계대출 잔액이 줄어드는 동안 기업대출은 늘었다. 여신 전략의 무게중심이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다.

문제는 현실이다. 기업들의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 내수 부진은 길어졌고 고금리 부담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원가는 오르는데 물건은 예전만큼 팔리지 않는다.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는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올해 2월 말 기업대출 연체율은 0.76%까지 올랐다. 중소기업 연체율은 0.92%에 달했다. 그간 비교적 안정적이던 대기업 연체율마저 28개월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대출을 늘려야 하는 바로 그 시점에 경고음도 함께 커진 셈이다.

'우량 기업 위주로 골라 빌려주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지난해 5대 은행의 대기업 대출은 7% 넘게 늘었다. 반면 중소기업 대출은 1% 증가에 그쳤고 자영업자 대출은 오히려 줄었다. 정책이 겨냥한 과녁은 혁신기업과 중소기업이었는데 실탄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대기업에 더 많이 꽂힌 것이다. 이를 은행이 몸을 사린 결과로만 볼 수는 없다. 건전성을 지켜야 하는 은행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에 가깝다.

자본 부담도 만만치 않다. 5대 은행의 위험가중자산은 사상 처음 1000조 원을 넘어섰다. 기업대출은 주택담보대출보다 위험가중치가 높다. 대출을 늘릴수록 은행의 자산 위험도도 함께 올라간다. 규제 완화로 숫자상 여력은 생겼지만 기업대출을 늘릴수록 위험자산도 함께 불어난다. 현장에서 느끼는 부담이 쉽게 줄지 않는 이유다. 대출을 줄이면 정책 취지에 역행하고 늘리면 부실 위험을 떠안는다. 생산적 금융의 딜레마는 여기서 시작된다.

이 딜레마를 은행 혼자 풀 수는 없다. 한국은행도 중소기업 대출에 위험가중치를 완화한 유럽 사례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총량을 늘리라는 압박보다 어디에 어떻게 흘려보낼지 설계가 먼저라는 뜻이다. 될 기업을 가려내는 심사 체계, 위험을 나누는 정책금융과 보증, 실패했을 때의 책임 구조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 그래야 은행도 중소·혁신기업 쪽으로 더 넓게 발을 뗄 수 있다.

돈의 흐름을 바꿔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부동산이 아닌 기업과 기술로 자금이 가야 경제도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다만 의지만으로는 부족하다. 줄 위에 선 은행에 필요한 건 채찍만이 아니다.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갈 수 있게 해주는 균형추다. 생산적 금융이 또 다른 부실의 이름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은 속도보다 균형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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