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사분계선(MDL)을 기점으로 남북 각 2km 구간의 비무장지대(DMZ) 상황은 대조적이다. MDL 이북 DMZ 구역에선 철조망 설치, 불모지 정비, 지뢰 매설 작업이 한창이다. 남한을 ‘적(敵)’으로 규정한 북한이 국경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반면 MDL 이남 DMZ 구역은 평화의 단꿈에 젖어 있다. ‘DMZ 평화적 이용 관련 범정부 태스크포스(TF)’는 평화의길 재개방을 추진 중이고, 여권 일각에선 유엔사 승인까지 건너뛰는 ‘DMZ법’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73년 세월의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현실’과 남한의 ‘이상’이 맞서는 것이다.
협박은 북한의 필살기지만, 이번엔 ‘진정성’이 느껴진다. 협상에서 무엇을 더 얻어내려고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던 과거의 ‘벼랑 끝 전술’과는 다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022년 “북한에 적대하는 어떤 국가든 핵무기로 얻어맞을 각오를 하라”며 핵무력 사용을 법제화했다. 이듬해엔 “유사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남조선 영토를 평정하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라”며 전쟁 의지를 노골화했다. 북한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이 남북문제를 군사적 무력을 통해 해결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변경했다”고 평가했다. 헌법과 조직체계에서 동족의 흔적을 지우고 물리적 단절에 속도를 내는 것도 핵 사용과 무력 점령을 위한 명분 쌓기로 봤다.
그런데도 이 정부가 또다시 평화 기대감을 표명하자 북한은 “멍청한 바보들의 희망 섞인 해몽”이라고 조롱하고, 집속탄 탑재 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했다.
허풍도 아니다. 수십 년간 핵을 개발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더니 뒤로는 핵전력을 고도화했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2025년 1월 기준 북한이 핵탄두 50기와 핵분열 물질(40기 생산량)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촉발한 북러 군사협정은 핵무력 완성의 마지막 퍼즐이 될 가능성이 있다.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은 지난주 미국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북러는 완전한 파트너십 수준으로, 북한이 이전에는 스스로 못하던 것들을 할 수 있게 된 매우 중요한 변화”라고 지적했다.
북한은 핵을 손에 쥐고, 러시아와 중국을 등에 업으면서 ‘몸값’을 올렸다. 지난달 김 위원장은 “낡은 기준에 맞춰졌던 관행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격에 상응한 외교 전술을 구사해야 한다”고 했다. 위협의 차원을 달리하겠다는 의미다. 이런 북한을 대하는 한국의 위기관리 능력도 정교해져야 한다. 그런데 이달 초 대정부질문에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현재로선 남북 간 군사적인 긴장 같은 이상 징후는 없다”고 했다. 김준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북한이 교류를 거부하는 건 같이 하자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비굴하게 느껴지더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북에) 구애하고 대시하면 자연스럽게 더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둘의 대화는 민망함을 넘어 참담할 정도다.
30년간 선의에 기반했던 북핵 폐기 시도는 북한에 기막힌 승리를 안겨줬다. 뼈아프지만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 그렇다. 좋든 싫든 미국과의 확고한 동맹은 북한의 ‘전쟁’ 도발을 억지하는 유일한 길이다. 이를 토대로 ‘평화’를 위한 전략적 지혜도 짜내야 한다. 더구나 지정학에 지경학을 더한 세계질서 재편 속에서 ‘운명 공동체적 신뢰 동맹’의 중요성은 커지고 있다. 이 와중에 최근 불거진 한미관계 불협화음은 불필요하고, 무책임하기까지 하다. 정 장관의 DMZ 출입 승인, 9·19군사합의 선제 복원, 구성 핵시설 발언 논란이 초래한 ‘한미관계 사달’은 도대체 누구에게 이로운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