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창] 만리동에서 길을 잃다

입력 2026-04-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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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땐, 다른 동네에 놀러 갔다가 돌아올 때 종종 길을 잃었다. 어찌어찌해서 집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꽤 당황스러운 경험이었다. 조금 더 커서는 일부러 길을 잃은 적도 있다. 여유가 생긴 걸까. 아니, 낯선 길을 헤맬 때 느껴지는 두려움과 묘한 쾌감 때문이었다. 처음 가보는 골목에서 잠시 멈칫하다가, 어느 순간 낯익은 골목이 나타날 때의 그 짜릿함이라니. 그때의 길 잃음은 내겐 소박한 탐험이었다. 낯선 길은 불안하기도 하지만, 그 못지않은 설렘도 있었다.

요즘은 좀처럼 길을 잃지 않는다. 오히려 길을 잃는 일을 시간 낭비로 여긴다. 스마트폰 지도는 늘 가장 빠른 경로를 알려주고, 헤맬 틈을 거의 주지 않는다. 편리해졌지만 그만큼 우회와 방황에서 생기던 기대와 긴장 역시 사라졌다. 더 빠르지만, 덜 경험하게 되었다.

행정적으로 중림동에 속했던 만리동은 조선시대 문신 최만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우리는 그를 한글 창제를 반대했던 인물로 기억한다. 세종의 결정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도 그는 버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세종은 그를 계속 중용했다. 오늘의 시선으로 보면 반대자였지만, 당대에는 함께 논쟁하며 국가의 중대사를 걱정했던 인물이었다. 그런 까닭에 지금의 퇴계로, 충무로처럼 위인의 이름을 기리듯, 이 일대는 만리재라 불렸고 근대 이후 만리동으로 이어졌다.

그 만리동이 지금은 사라졌다. 지번 주소가 도로명 주소로 바뀌면서 ‘만리재로’라는 이름은 남았지만, 재개발로 동네의 옛 형체는 온데간데없다. 이제 그곳은 동네의 이름보다 아파트 브랜드로 더 익숙하다. 지번 주소가 한 자리에 머무는 삶에서 나온 이름이라면, 도로명 주소는 이동의 편의성에 맞추어진 이름이다. 우리는 목적지를 더 쉽게 찾게 되었지만, 그만큼 동네 저마다의 개성은 희미해졌다.

오랜만에 찾은 그곳은 이미 예전의 그 동네가 아니었다. 장소는 기억의 서식지와 같다. 그 서식지가 사라지면 기억은 허공 속에 떠돈다. 아파트 단지로 바뀐 그곳에서 나는 방향을 정하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어릴 때의 의도적인 길 잃음이 미지로의 여행이었다면, 지금의 방황은 사라진 기억을 더듬는 공전이다. 개발과 효율의 시대에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나만의 영토는 그곳을 떠도는 나의 기억 속에 있다.

청소년기 5년 정도를 보냈던 만리동에는 아이스케이크를 사 먹던 구멍가게, 문방구와 오래된 이발소가 있었고, 등굣길마다 마주치던 단발머리 여학생이 있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지나갔던 어색한 순간들. 그 흐릿한 장면들은 추억이라기보다 감각으로 남아 있다. 낯선 듯 익숙한 감정, 알 수 없는 떨림. 붙잡을 수 없는 풍경이 내가 살면서 묵혀 온 에로티시즘이다. 이 에로티시즘은 자극이 아니라 신비다. 단번에 모든 것을 드러내는 노골적인 정보가 아니라, 굽이진 골목길처럼 다음 장면이 궁금해지는 긴장감이다.

에로틱한 삶이란, 모든 것이 투명하고 빠르게 소진되는 세상에서, 각자가 지닌 불투명하고 굼뜬 신비를 지켜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무언가를 이루려는 마음이 아니라, 서투름과 방황, 그리고 서사 속에서 움튼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만리동을 하나씩 잃으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었지만, 나는 만리동에서 또 길을 잃었다. 에로티시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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