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업이 변할 때 가장 먼저 바뀌는 것은 공장이 아니다. 회의실이다. 최근 국내 주요 기업들의 움직임을 보면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삼성전자는 사장단을 대상으로 AI 집중 교육인 'AX 부트캠프'를 시작하고 SK그룹은 경영전략회의와 이천포럼을 통합한 '뉴 이천포럼'을 열었다. LG그룹은 최고경영진이 직접 AI 활용 방안을 점검하고 있으며 현대자동차그룹은 제조 현장과 로봇 사업을 연결하는 AI 교육과 실증을 확대하고 있다.
겉으로 보면 모두 AI 도입 이야기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본질은 기술이 아니다. '회의 방식'과 '의사결정 구조'를 바꾸는 일이다. 많은 사람이 AI 혁명을 새로운 소프트웨어 도입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기업 경영 현장에서 AI의 의미는 훨씬 크다. 과거 디지털 전환이 업무 효율을 높이는 과정이었다면 AI 전환은 경영 판단 자체를 바꾸는 과정에 가깝다. 과거 기업 회의는 경험과 직관에 의존했다. 임원의 경력과 현장 감각이 중요했다. 하지만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수많은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앞으로 경영진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보다 "AI가 제시한 답을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에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이미 이런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생성형 AI는 단순한 보고서 작성 도구를 넘어 의사결정 보조 시스템으로 진화하고 있다. 시장 분석, 생산 계획, 물류 최적화, 연구개발 방향 설정까지 AI가 관여하는 영역은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한국 대기업들이 최고경영진 교육에 집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AI를 현장 직원들에게만 맡겨서는 조직 전체가 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고경영자(CEO)와 사장단이 먼저 이해하고 활용해야 투자와 조직 개편, 사업 전략 수립 과정에서도 AI가 작동할 수 있다.
삼성의 사장단 교육은 상징적이다. 1993년 이건희 선대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고 외쳤을 때도 핵심은 제품이 아니라 조직 문화였다. 이번 AI 전환 역시 마찬가지다. AI 프로그램 몇 개를 도입한다고 기업이 AI 기업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일하는 방식과 보고 체계, 의사결정 구조가 바뀌어야 진정한 변화가 시작된다. SK의 뉴 이천포럼도 같은 맥락이다. 과거에는 경영진이 전략을 수립하고 구성원이 실행했다. 그러나 AI 시대에는 현장의 데이터와 실행 경험이 곧 전략이 된다. 경영진과 구성원이 함께 토론하고 학습하는 구조가 중요해지는 이유다.
더 큰 변화는 제조업에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AI는 더 이상 사무실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현대차의 로봇, SK의 AI 팩토리, 삼성의 제조 혁신 프로젝트처럼 AI는 공장과 물류센터, 연구소로 이동하고 있다. 향후 기업 경쟁력은 얼마나 많은 데이터를 보유했느냐보다 그 데이터를 얼마나 빠르게 의사결정에 반영하느냐에 달릴 수 있다.
그래서 지금 한국 기업들은 공장을 바꾸기 전에 회의를 바꾸고 있다. AI 시대의 승부는 기술 도입 속도가 아니라 의사결정 속도에서 갈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1990년대 정보기술(IT)이 기업의 업무 방식을 바꿨다면, 2020년대 AI는 기업의 사고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거창한 연구소가 아니라 최고경영진이 모여 앉은 회의실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