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에서도 SK, 현대차, LG 등 주요 그룹은 이미 정기 공채를 폐지하고 수시 채용으로 전환했다. 4대 그룹 가운데 70년 전통의 공채를 유지하는 기업은 삼성전자가 유일하다.
그러나 채용의 문이 닫혔다 해서 일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채용 현장 곳곳에서 AI 에이전트와 '내부 인력 재배치'가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기업은 이를 '인적 자본의 효율적 운용'이라 포장하지만, 현장의 노동자들은 '조용한 채용(Quiet Hiring)'이라 읽는다. 신규 채용 없이 기존 직원에게 AI 숙련도를 요구하며 업무의 경계를 무한정 넓히는, 보상 없는 확장이기 때문이다.
이 인색한 경영의 배경에는 거대한 대외적 불확실성이 있다. 2025년 미국이 촉발한 관세 전쟁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요동쳤고, 미·중 양국의 보복 관세가 사실상 경제적 디커플링 수준에 이르면서 기업들의 투자 심리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여기에 막대한 AI 투자를 재무제표상 이익으로 증명하라는 시장의 압박까지 거세지면서, 벼랑 끝에 몰린 리더들에게 인건비 절감은 가장 손쉬운 탈출구가 됐다.
PwC의 '글로벌 AI 잡 바로미터(2025)' 보고서에 따르면 AI에 가장 많이 노출된 산업의 직원당 매출 성장률은 그렇지 않은 산업보다 3배나 높다. 기업들은 이 압도적인 생산성 격차에 취해, "사람이 없다"고 아우성치면서도 '당장 AI를 부릴 줄 아는 숙련자'만 찾으며 채용의 문을 더 굳게 걸어 잠근다.
하지만 이 화려한 지표의 이면에는 역설이 숨어 있다. AI가 초안을 잡으면 인간은 쉴 새 없이 이를 검토하고 책임져야 하는 '관리감독 머신'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결정 권한은 모호해지고 책임만 무거워지는 상황에서 노동자의 정신적 피로, 이른바 '결정 피로(Decision Fatigue)'는 임계점에 도달했다.
리더들이 간과하는 치명적인 데이터가 있다. 딜로이트의 '2026 글로벌 휴먼캐피털 트렌드' 보고서에 따르면 조직의 59%가 AI에 대해 철저히 기술 중심의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조직은 인간 중심의 접근을 택한 경쟁사에 비해 AI 투자에서 기대를 초과하는 수익을 거두지 못할 가능성이 1.6배나 더 높았다. 기존 인력을 AI로 쥐어짜는 기술 만능주의가 오히려 수익성을 갉아먹고 있다는 서늘한 경고다.
에이전틱 AI가 도입되면서 중간 관리자의 역할은 축소되고, 동료 간의 신뢰는 무너지고 있다. 알고리즘이 내린 판단에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AI는 파트너인가, 침입자인가?
과거의 자동화가 공장의 반복적인 육체노동을 대신했다면, 지금의 AI는 분석, 판단, 창작이라는 지식 노동의 핵심을 파고들고 있다. 대체의 범위가 '손'에서 '머리'로 옮겨간 것이다. 인구 구조 변화로 노동력이 희소 자원이 되는 시대에 인간을 단순 비용으로 취급하는 전략은 유효기간이 끝났다.
진정한 승자는 가장 빠르게 자동화를 구축한 조직이 아니라, 자동화로 얻은 여력을 인간의 독창적 가치에 재투자하는 조직이다. '실패율 1.6배'라는 경고등이 켜진 지금, 리더들은 조직의 혁신 설계도에 '사람'이라는 글자가 들어있는지부터 다시 살펴야 한다. 혁신은 기술이 하지만, 그 혁신을 가치로 완성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