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계약 짧아지고 공급사 힘 커져
수요 둔화에도 계약은 더 확실하게

공급 부족이 장기화되면서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거래 질서가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반도체 공급 부족 흐름이 장기간 이어지며 장기공급계약(LTA)의 주도권이 고객사에서 반도체 공급사로 이동하는 모습이다. 과거에는 안정적인 조달을 원하는 스마트폰·PC 제조사들이 장기계약을 먼저 제안했다면, 최근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메모리 업체들이 계약 조건을 먼저 제시하며 시장의 힘의 균형이 바뀌는 모습이다.
9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국내 메모리 업체들이 체결하는 LTA의 계약 기간이 짧아지고 있다. LTA 기간은 제품과 수요처마다 6개월에서 1년 등 다양한데, 최근 이 기간이 단축됐다는 것이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애기다.
반도체 공급 부족이 이어지자 공급사들이 계약 기간을 짧게 가져가려는 것으로 분석된다. 가격 상승 국면에서 계약 기간이 짧을수록 공급사는 공급 가격을 보다 신속하게 반영할 수 있어 협상력 측면에서 유리하다는 계산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LTA의 주도권 역시 기존 고객사에서 메모리 공급사로 넘어가는 분위기다. 이전에는 스마트폰·PC 제조사들이 물량 확보 차원에서 장기공급계약을 먼저 제안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지만 최근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공급사들이 계약 조건과 구조를 주도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설명이다. 반도체 공급 부족 국면이 길어지며 거래 관계의 무게추가 공급사 쪽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종욱 삼성증권 연구원은 “장기공급계약을 먼저 제안한 것은 고객들이었지만 이제는 메모리 공급사들이 LTA를 주도하는 상황”이라며 “NCNR(취소·환불이 불가능한) 조건에 가격 협상이 없는 계약이 PC와 모바일, 범용 D램까지 확대되면서 시장 내 유동 물량이 급격히 줄고 있다”고 분석했다.
‘사재기’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스마트폰 제조사들은 올해 LTA에 따른 메모리 구매 물량을 당장 하향 조정하는 데 극도로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트렌드포스는 “가격 추가 상승과 공급 부족 가능성을 우려해 향후 물량 할당 제한을 피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자원 확보를 우선시하고 있다”고 전했다. 글로벌 스마트폰 수요가 둔화되는 등 시장 전망이 부정적임에도 향후 공급 제약과 추가적인 조달 비용 상승을 우려해 반도체를 사둔다는 것이다.
스마트폰 업체들은 당장 생산량을 줄이거나 계약 물량을 깎기보다, 앞으로 메모리를 제때 받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해진 상황이다. 지금 계약을 건드렸다가 다음 분기나 내년에 물량을 제대로 못 받거나 더 비싼 가격에 다시 계약해야 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래서 시장 상황이 좋지 않아도 장기공급계약은 그대로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메모리 업체도 이같은 흐름에 공감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최근 진행된 지난해 4분기 실적발표 후 컨퍼런스콜에서 “과거 LTA는 물량 약속이 느슨했고 시장 상황에 따라 유동성이 컸다”면서 “최근 논의되는 LTA는 단순한 구매 의향이 아니라 고객과 공급업체가 서로 물량을 확실하게 약속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공급사 입장에서는 수요에 대한 가시성이 과거보다 훨씬 중요해졌다는 의미다.
업계 관계자는 “유례없는 메모리 공급 부족 국면에서 갑과 을의 지위가 바뀌고 있다”며 “전자제품 수요가 둔화돼도 반도체 공급 계약은 유지되고 이 계약들이 다시 공급 부족과 가격 상승을 고착화하는 구조”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