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부 시절 과학기술 수석보좌관을 지낸 김태유 서울대 교수는 그의 저서 ‘패권의 비밀’에서 과거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된 비결로 변칙적인 자국 기업 지원을 꼽았다. 영국은 산업혁명의 기폭제가 된 증기기관 기술을 본격적으로 산업화하기도 전에 특허 기간 만료일을 맞았다. 정부는 기나긴 토론을 거쳐 특허 기간을 20년 연장하기에 이른다. 다른 나라가 증기기관을 산업화하는 것을 늦추기 위한 특별 조치다. 법으로 정한 특허 기간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론은 영국의 이해관계 앞에서 무시됐다. 영국 정부가 힘을 이용해 일종의 반칙을 한 것이다. 이 결정으로 영국은 신(新)기술을 돈으로, 힘으로 바꾸는 데 성공해 세계 패권 국가로 우뚝 섰다.
김 교수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도 영국에 대한 ‘관세(tariff)’ 반칙으로 미국을 농업 국가에서 성공적인 공업 국가로 진보시켰다고 평가했다. 그밖에 원칙을 벗어난 정부의 제도적 지원이 그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데 성공한 역사적 사건들을 책에서 기술했다. 기술 혁신과 경제적 성공에는 정부의 정책과 제도적 지원 등의 제반 환경이 상당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촉발한 관세 전쟁도 글로벌 무역 관점에서 보면 미국을 다시 부강하게 만들기 위한 일종의 반칙이다. 트럼프의 성공 여부를 떠나서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가 관세 전쟁을 포함한 기술 패권 전쟁에 참전하게 됐다. 먹고 사는 문제를 건 치열하지만, 총성 없는 전쟁이다. 이 전쟁에 나가 직접 몸으로 부딪혀 나가 싸우는 최전방 군인들은 우리 기업들이다. 반도체, 자동차, 인공지능(AI), 액화천연가스(LNG)선박, 소형원전(SMR), 우주(위성), 군수, 태양광 등의 분야에서 해외 기업들과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빠른 의사결정을 통한 대규모 투자와 물심양면으로의 국가적 지원 없이는 이기기 어려운 싸움들이다.
국내 상법 개정 분위기에 발맞춰 해외 대형 사모펀드(PE)들이 거대한 자본력으로 국내 기술기업 경영권을 노리고 있다. 그들은 점차 지배주주의 지분율이 줄어드는 국내 기업의 지배구조상 약한 고리를 파고들 가능성이 크다. 이미 짐을 싸 들고 한국에 사무소, 법인을 설립하는 곳들이 늘고 있다. 정부는 전쟁의 한 중간에 서 있는 우리 기업들을 정책·제도적으로 어떻게 지원할지를 놓고 머리를 싸매야 한다. 상법 개정도 옳고 그름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우리 기업들이 전쟁하는 데 도움이 되느냐 무거운 짐이 되느냐를 두고 득실을 따져야 한다. 대선을 앞두고 개인 투자자의 표심을 얻기 위해 당위의 프레임만을 강조하다가는 생각보다 잃는 게 많아질 수 있다.
미래 먹거리 전쟁에서 이길 전략을 먼저 세우고 상법 개정 여부를 공론의 장에서 토론해도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