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현 칼럼]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

입력 2023-06-1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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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

정부와 국민 욕뵈는 발언을 한

싱하이밍 안하무인도 문제지만

꿔다놓은 보릿자루 역할에 그친

이 대표와 민주당, 크게 반성해야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가 뉴스 메이커가 됐다. 8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앞에서 쏟아낸 안하무인 언사 때문이다. 시중에는 위안스카이를 연상시킨다는 사람이 많다. ‘삼전도의 굴욕’를 말하는 이들도 있다. 위안스카이는 조선 말기 정국을 주무르며 10년 넘게 갑질깨나 한 문제적 인물이다. 삼전도는 남한산성에 피신했던 인조가 결국 청 태종에게 항복해 맨땅에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 병자호란 때의 치욕적 경험을 뜻한다. 싱 대사는 그만큼 오만방자했다. 중국과 연결되는 19세기, 17세기의 쓰라린 기억을 즉각 소환할 만큼이나.

나는 더 멀리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임진왜란 때의 중국 관원을 떠올렸다. 명나라 호부 주사 애자신(艾自新)이다. 조선왕조실록은 1593년 2월 1일 기록에서 전한다. “애자신이 군량이 계속 조달되지 않는다고 김응남, 민여경, 황진에게 곤장을 쳤다”고.

명나라 주사는 어찌 봐도 하급 관원이다. 매질을 당한 이들은 조선의 고관들이다. 김응남은 정2품 관량관(管糧官)이니 현재의 장관급이고, 함께 매타작을 당한 민여경과 황진은 종2품 호조 참판(현재의 차관), 정3품 의주 목사(시장)다. 같은 나라의 벼슬아치였다면 같은 자리에 앉지도 못할 만큼 위계 차이가 컸다. 김응남 등만이 아니라 직간접으로 그 사태를 겪은 모든 이들에게 실로 참담한 치욕이었을 것이다.

싱 대사는 중국 외교부의 국장급이다. 그날 자리를 함께한 이 대표는 어떤가. 16세기 정2품 관량관보다 훨씬 더 높은 위상의 실세 정치인으로, 대한민국의 의전 서열 8위다. 싱 대사의 자국 서열은 어떨까. 그런 게 있지도 않겠지만 굳이 따진다면 적어도 수천, 수만 명을 헤아리고 난 다음에나 차례가 돌아갈까 말까일 것이다. 싱 대사로선 함부로 말하고 행동할 입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 처신은 전혀 달랐다. 싱 대사는 결코 정중하다 할 수 없는 자세로 훈시에 가까운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한국이 중국과의 관계를 처리할 때 외부 요소의 방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등 내정간섭 논란을 부를 수밖에 없는 무례한 발언을 쏟아낸 것이다. “중국 패배에 베팅하는 이들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고도 했다. 한중 외교사에 길이 남을 협박성 발언이다.

이해하기 어렵기로는 이 대표도 오십보백보다. 도를 한참 넘은 발언이 이어지는 동안 조용히 듣기만 했다. 볼기를 치면 엉덩이를 대준다는 것인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 역할이 좋기만 했다는 것인가. 민주당은 또 뭔가. 그런 한심한 장면을 유튜브를 통해 여과 없이 생중계했다. 분별없는 짓이다. 왜 “중국 국민은 일치단결해서 시진핑 주석의 지도하에 위대한 중국몽을 진행한다” 같은 꼴불견 발언을 우리 시청자들이 이 대표와 함께 경청해야 했는지 알 길이 없다.

애자신은 400여 년 전 조선 고관의 볼기를 쳤다. 싱 대사는 매타작 대신에 한국 정부와 국민을 겨냥한 고압적 언행을 했다. 엉덩이 대신 가슴을 후벼판 꼴이다. 어느 쪽이 더 중한지는 다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도 있다. 정상적 국가관계에서라면 저런 불상사는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외교부는 한술 더 뜨고 있다. 10일 정재호 주중 한국대사를 불러 “한국은 현재 한중 관계의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지 깊이 반성하고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고 했다. 전형적인 적반하장이다.

임진왜란에 앞서 이순신 장군을 전라좌수사로 전진 배치하는 등 국란 극복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 있다. 당대 영의정을 지낸 서애 유성룡이다. 그 또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명군 장수 이여송에게 곤장을 맞을 뻔한 일이 있다.

유성룡이 후세를 위해 남긴 임진왜란에 대한 입체적 기록이 있다. ‘징비록’이다. 유성룡은 거기서 당시 백성들이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라 한탄했다고 전한다. 왜군, 명군 둘 다 우리 백성과 국토를 대단히 혹독하게 수탈했다는 뜻이다. 참빗이 훨씬 가늘고 촘촘하니 엄밀히 말해 명군이 외려 더 지독했다는 뜻도 담겨 있다.

애자신은, 그리고 이번에 사고를 친 싱 대사는, 아마도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이 대표도, 민주당도 외교 역량을 키우고 싶다면 먼저 징비록부터 정독할 일이다. 누가 불러준다고 아무데나 가서 밥부터 먹을 게 아니라….trala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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