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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시각] 궁극의 물음

입력 2020-09-23 17:38

시인, 인문학 저술가

하얀 화염(火焰)이 펄럭이던 여름이 돌연 끝나고, 가을의 서늘함이 그 빈자리를 차지한다. 낮의 온기는 따스하고, 밤의 공기는 차갑다. 갑자기 바뀐 날씨에 긴 소매옷을 꺼내 입으며 하나의 심장, 하나의 위, 하나의 췌장을 갖고 견디는 나는 ‘바람이 분다, 다시 살아봐야겠다’라는 폴 발레리의 시 구절을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이 돌연한 행동은 계절의 변화가 내 뇌하수체에 새로운 호르몬 분비를 자극한 탓이다. 파주의 하늘엔 새떼가 몰려가고, 해질녘 어둠이 그 풍경을 지우면 지상의 수풀에서 여리고 날카롭게 우는 풀벌레들 노래만 쓸쓸하게 울려퍼진다. 이 호젓한 시각,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전곡을 들은 뒤, 하늘 높이 뜬 달 아래 그림자를 밟고 서면 나는 가혹한 무더위와 사나운 물것들을 이기고 살아남은 스스로에게 보상으로 아늑한 휴식을 주고 싶다. 지금 이 찰나, 언젠가 생명 없는 원소로 해체되어 사라질 그 순간까지 우리 안에서 들끓는 생에의 의지는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가을밤에 화집을 들춰 보는 건 내 취미 중 하나다. 폴 고갱(Eugene Henri Paul Gauguin, 1848.06.07.~1903.05.08)의 화집에서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란 그림을 들여다본다. 프랑스 파리에서 증권회사 중개인으로 중산층 생활을 꾸리며 취미로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수집하던 고갱은 돌연 전업 화가로 변신해서 주변을 놀라게 한다. 고갱은 타이티 섬에서 원주민 여성과 결혼하고 그림에 전념하는데, 이 그림은 그 시절에 그린 대표작이다. 고갱은 이 한 작품에 인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담아내려는 야심을 드러낸다. 이 그림에 붙은 화제(畵題)는 모든 인간이 가슴에 품은 궁극의 물음일 테다. 인간의 기원을 탐색하고, 인간 조건을 주의깊이 성찰해온 진화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도 ‘지구의 정복자’라는 저서에 이 똑같은 문구를 부제로 달았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은 과연 가을밤의 화두로 삼을 만하다. 신경과학, 생물학, 유전학 등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인간이란 “거대한 초유기체 지구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하나의 잡다한 종”에 속하고, 이 생물체는 “미생물 세포들과 사람 세포들이 반침투성 틀 속에 한데 엉겨 살아가는 존재”(다이앤 애커먼, ‘휴먼 에이지’, 406쪽)다. 지구 역사 45억 년 동안 일어난 사건 중 가장 놀라운 건 이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일 테다. 30만 년 전 영장류에서 진화한 존재로 나타난 현생 인류는 미미한 동물군 중 하나에 불과했다. 인간은 빠르지도 않고, 힘도 세지 않다. 인간보다 사납고 빠르고 힘센 맹수들이 많았지만 인간은 그 빠르고 힘센 종들을 제치고 하늘과 땅, 바다를 거머쥐고 지구 구석구석을 휘젓는 존재로 두각을 드러낸다. 기원전 1천 년 1천만 명에 도달한 지구 인구는 2천 년 뒤 3억에 이르고, 5백 년 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살던 르네상스 시대에는 다시 5억으로 늘었다. 다시 5백 년 뒤인 20세기 중반 25억에 도달하고, 지구 인구는 눈부신 속도로 증식하여 2020년 현재는 약 78억에 이른다. 지구가 생육하고 번성한 인류로 가득 찬 유일한 별이 된 것은 거의 기적이다. 인류는 어떻게 지구 일부는 야생 상태로 보존하고, 나머지를 자연 경관으로 가꾸며 그 운명을 쥐락펴락하는 거대 집단이 되었을까?

인간은 늘 들썩거리고 부산하고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빙하기가 후퇴하기 시작한 이래, 사실상 눈 깜빡하는 순간에 불과한 지난 1만1700년 동안, 우리는 농업, 문자, 과학처럼 주옥같은 발명들을 해냈다. 사방팔방으로 여행하고, 강의 긴 손가락들을 따라가고, 눈 덮인 왕국들을 건너고, 어질어질한 협곡들을 오르고, 외딴섬과 극지방을 탐사하고, 장식용 등처럼 발광하는 물고기나 황금빛 눈을 지닌 해파리 따위가 우글거리는 심해로 몸을 던졌다. 위로는 별을 숭배하고 지상에서는 불을 다스리고 등불을 엮어서 어둠을 밝혔다. 오즈 같은 도시들을 세우고, 고향 행성을 벗어나서 항해하고, 달에서 골프를 쳤다. 산업과 의학을 마술처럼 일으켰다. 대륙을 이리저리 움직일 줄은 몰랐어도, 도시와 농업과 기후변화로 대륙들의 윤곽을 지우고 다시 그렸다. 강을 막고 물줄기를 돌렸으며, 퇴적물을 두껍게 쌓아서 새 땅을 만들었다. 숲을 밀고 땅을 긁어내고 포장했고. 우리는 지표면 75퍼센트를 점령했다.(다이앤 애커먼, 앞의 책, 21쪽)

박물학자이자 뛰어난 에세이스트인 다이앤 애커먼은 지구에 처음 나타났을 때 미미한 집단이던 인류가 빙하기 이후 지구의 정복자로 등극하는 1만 년의 역사를 솜씨 좋게 압축한다. 지표면 75퍼센트를 장악한 인류가 ‘휴먼 에이지’를 연 것을 우연으로 볼 수는 없다. 인류는 변덕스럽고 가혹한 기후와 거친 야생에 맞서서 살아남았으며 “손재주, 지략, 융통성, 꾀, 협동”(다이앤 에커먼, 앞의 책, 19쪽)을 배우고 그 바탕 위에서 농업, 문자, 과학, 국가를 발명하면서 번영의 토대를 쌓았다. 인류는 이 대륙에서 저 대륙으로 이동하고, 바다를 가로질러 교역을 확장하고 문화를 전파하며 ‘인류세’를 연 것이다. 인간은 얼마나 경이로운 존재인가!

잠깐, 다시 생각해 보자. 과연 인간은 위대한 업적을 근거로 동물보다 우월한 종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철학자 존 그레이의 생각은 부정적이다. 동물들은 태어나 짝을 찾고 음식을 구하고 죽음을 맞는, 전적으로 우연에 지배당하는 무리다. 반면 인간은 자유로우며 이성을 가진 인격체라고 믿고, 우리 삶과 행동이 의식적 선택의 결과라고 확신한다. 이런 차이에 근거해서 동물보다 인간이 더 뛰어난 존재라는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을 강화한다. 이게 진실일까? 반휴머니즘 철학자인 존 그레이는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에서 우리 삶이 이성적 선택의 결과물이 아니라 아무 의미도 없이 쪼개진 꿈과 욕망의 조각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에 근거해 인간이 추구(芻狗, 풀로 엮은 개) 같이 하찮은 존재, 즉 “변화하는 환경과 무작위로 상호작용하는 유전자 조합에 불과하다”라고 단정짓는다.

인류는 지구에서 누린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최상위 포식자라는 생태적 지위를 거머쥐었지만 마냥 승리감에 도취해 있을 수만은 없다. 난폭한 운전자 같은 인류가 번성한 것은 숙주인 지구에 만성적 감염의 과부하와 생물 대멸종의 위기를 불러온 촉매제가 되었다. 지구에 닥친 생태 위기를 몰고 온 주범은 인간이다. 인간이 자연을 훼손한 결과로 환경오염, 기후변화, 해양 온도의 상승, 극지방 빙하의 녹음, 다양한 생물종의 사라짐이라는 재앙의 연쇄를 불러들인 것이다. 신종 바이러스 감염병의 세계적인 대유행도 어쩌면 온갖 쓰레기와 더불어 미세플라스틱, 환경호르몬, 탄소배출 등으로 지구 생태계의 자기회복력을 망친 인간을 향한 가이아의 무서운 복수이자 역습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연에게 말기 암세포 같이 넓게 퍼진 유해한 병원체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한 치 앞조차 가늠할 수 없는 운명의 변곡점 앞에 서 있다. 인류세의 종말이 멀지 않았다는 징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자연이라는 거울 앞에서 제 모습을 비춰봐야 한다. 그리고 인간 종 중심주의는 물론이거니와 컴퓨터, 유전공학, 나노기술 따위를 기반으로 하는 기술과 과학이 인간의 난제를 다 해결할 것이라는 맹신에서 깨어나야 한다. 지구는 인간 전유물이 아니라 수많은 생물종들이 함께 사는 행성임을 잊지 말자. 그 망각에 우리 스스로를 방치한다면 인류세의 종말은 더 빠르게 닥칠 것이다. 지금 우리 모두와 먼 미래에 이 지구에 올 인류를 위해, 겸손하게, 우리는 궁극의 물음 앞에 서야 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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