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박근혜가 살려낸 노무현’이라지만

입력 2016-11-16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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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연 온라인뉴스부장

올해 여든아홉이신 나의 친할머니는 TV에 그이만 나오면 “에그, 불쌍한 것”이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그리고 늘 덧붙이는 한마디, “아유, 근데 아직도 참 곱다.” 환갑이 넘어도 ‘불쌍하고 고와 보일 수 있는’ 능력자라니. 그래서 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박근혜 님, 당신은 참으로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가 봅니다.’

‘최순실 게이트’가 대한민국을 삼켜 버린 요즘 문득 떠오른 게 있다. ‘박근혜의 효도 정치를 막아야 한다’던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의 주장이다. 2012년 대선을 1년여 앞두고 출간된 책 ‘닥치고 정치’에서였다. 그는 국가를 ‘아버지의 유산’으로 보는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의 비뚤어진 정치관을 지적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로서는 그때 과대망상적인 주장이라고 여겼다. 이제 와 다시 보니 바로 그 점이 근본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국민적인 분노와 좌절이 폭발하는 요즘, 부쩍 다시 주목받는 인물이 있다. 바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불통과 오만함, 무책임과 몰염치의 대척점에 그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려고 대한민국 국민이 됐나’ 하는 자괴감과 절망 속에 문득 ‘이런 대통령이 있었지’라며 위로를 받는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 등 온라인 세상에선 노 전 대통령의 사진과 이야기가 돌아다닌다. 모 행사장에서 귤을 양복 주머니에 슬쩍 넣거나, 청와대 촬영 소식에 황급히 담배를 숨기고, 앵커 손석희와 TV출연료 농담을 하는 장면 등 소박하면서도 유머러스하다. 연설문을 직접 고치는 모습이나 2005년 농민 사망사건 당시 진심 어린 사과문 문구는 박 대통령을 대놓고 조롱하는 주제다. ‘그립습니다’, ‘요즘 보니 더 울컥합니다’라는 반응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온라인뿐만이 아니다. 지난달 26일 개봉한 ‘무현, 두 도시 이야기’는 독립영화의 흥행 기점이라는 10만 관객을 넘어섰다. 노 전 대통령의 글쓰기를 다룬 책 ‘대통령의 글쓰기’와 소통 및 설득의 기법을 엮은 ‘대통령의 말하기’는 베스트셀러 명단에 올랐다. 책과 사진, 각종 에피소드에서 드러나는 노 전 대통령의 상징적인 장점들, 즉 소통, 소탈함, 유머, 뚜렷한 소신과 철학은 잠시나마 우리를 치유해 준다.

그러나 ‘지금 이런 상태만 아니면 된다’며 눈에 보이는 장단점에만 집중한다면 편협한 시각을 벗어날 수 없다. 불통 때문에 사달이 났으니 소통만 문제없으면 된다는 식은 곤란하다는 의미다. 몇 달 후가 될지, 아니면 1년여가 될지 모르지만 우리는 새로운 지도자를 뽑아야 할 중대한 선택을 앞두고 있다. 자, 이렇게 놓고 보자. 사랑했던 그녀와 결혼하고 보니 무능한 데다 오만하고 이상한 사람 말만 듣는 꼭두각시였다. 그녀와 이혼하고 재혼할 참이다. 새 파트너는 다른 건 따질 것 없이 지적 수준이 높고,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면 된다. 그러니까 전 배우자가 가졌던 단점만 없으면 된다는 식이다. 이거야말로 재혼에 실패하는 첫 번째 요인이다. “OO만 아니면(없으면 혹은 안 하면) 돼”라는 식으로 접근했다간 상대의 치명적인 약점을 놓칠 수 있다.

박 대통령을 만든 건 이전 정권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심리였다. 사사로움에 얽매이지 않는 원칙적이고 굳건한 이미지는 그런 기대를 부추겼다. “지금처럼 불안해하며 살지는 않게 해 주겠지” 해놓고선, 지금 “내 발등 내가 찍었다”라며 한탄하고 있지는 않은가. 노 전 대통령의 감성적인 혹은 감상적인 이야기가 넘쳐나는 걸 조심스러운 시각으로 보는 이유다. 앞으로 전임자의 단점을 상쇄하는 특정 이미지만 강조한 인물에게 급하게 애정을 쏟아선 안 될 일이다. ‘사랑을 쏟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가려내는 눈은 더욱 높아져야 한다.

다시 할머니 얘기로 돌아가자면, 거의 두 달 만에 고향에 계신 할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대통령에 관한 뉴스를 들으셨냐고 여쭈었다. 할머니는 대뜸 “하이고, 그런 정신 나간 인간, 치워뿌러라!”라며 역정을 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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