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이모, 여기 물 좀!”

입력 2016-10-12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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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연 온라인뉴스부장

친한 후배 하나가 항공사 승무원 15년 차다. 최근 만난 자리에서 그녀는 ‘진상 승객’으로 인한 고충을 토로했다. 그녀가 들려준 일부 승객들의 ‘진상짓’은 개념상실, 상상초월이었다. 한창 비행 중인 기내에서 자기가 원하는 신문이 없다며 어떻게든 구해오라고 억지를 부리는가 하면 식사 메뉴로 나온 비빔밥을 (멀쩡한 본인 두 손 놔두고) 비벼달라는 승객도 있단다. 폭언이나 욕설, 성희롱 같은 중범죄가 아니라 그나마 낫다고 해야 하는 건가 잠시 고민했다. “별 희한한 사람들도 다 있네”하며 맞장구를 쳤지만 참 갑갑했다.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감정노동자의 시커멓게 멍든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녀의 한숨 섞인 푸념을 듣고 있자니 요즘 온라인상에서 유행 중인 ‘남의 집 귀한 자식’ 티셔츠가 떠올랐다. 등에 커다랗게 ‘남의 집 귀한 자식’ 문구를 새겨 넣은 셔츠다. 식당이나 카페 종업원, 혹은 아르바이트생들이 이 셔츠를 입고 일하는 사진을 SNS에 올리며 화제가 됐다. 손님과 마찬가지로 ‘귀한 자식’이니 서로 함부로 대하지 말고 귀하게 여겨달라는 메시지다. 손님이랍시고 갑질을 오죽했으면 이런 셔츠까지 등장했을까 싶다.

엊그제 모 신문이 보도한 ‘불편한 진실, 2016 대한민국 갑질 리포트’란 시리즈를 읽으며 사람들의 갑질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 기자들이 직접 서울 중구청 민원실과 편의점, 대형마트, 서울시 다산콜센터에서 일일체험을 하며 겪은 일반인들의 갑질이 그려졌다. 반말은 예사에 막무가내로 욕지거리하고 고함에 삿대질, 엉뚱한 시비까지 마치 ‘종 부리듯’ 하는 현장이다. 본래부터 해당 근무자들의 한결같은 발언은 “오늘은 이만하면 나은 편”이라니 평소 갑질 수준이 짐작이 간다.

그동안 OO님(회장님, 사장님, 상무님, 소장님, 사모님 등)들이 벌인 갑질에 분개하며 핏대를 세웠던 이들이 또 다른 갑질의 가해자가 되는 불편한 진실이다. ‘한 자리’ 하는 이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갑질이 알고 보면 일상 속에 은밀하게 침투해 있는 거다. 생활에 스며든 알량한 권력관계가 유용한 노동을 제공하는 이들에게 갑질로 작용한다.

갑질도 추악하지만 더 아이러니한 점은 갑질을 당한 이들이 또 다른 갑질을 한다는 데 있다. 고객이란 이름의 상대방에게 멸시 당한 이들은 수모를 보상받기 위해 본인 역시 다시 멸시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어떻게 본다면 ‘갑질의 합리화’ 과정이다. 이렇다 보니 갑질 사슬의 하단에 위치한 이들(돈 없고, 어리고, 지위 낮은)까지 “내가 갑이네” 하며 목소리부터 높이는 것이다. 앞서 보도된 기사에서도 민원실이나 판매점 갑질 고객이 60~70대뿐 아니라 20~30대까지 다양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래서 ‘남의 집 귀한 자식 티셔츠’가 반갑다. 서비스 종사자를 수직관계가 아닌 수평관계로 인식하자는 을들의 요구와 갑질의 사슬을 끊자는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최저 수준의 급여를 받으면서 높은 수준의 감정 노동을 요구받는 이들의 정당한 ‘가치 찾기’인 셈이다. 최근 마포구의 어느 커피숍은 ‘반말로 주문하면 반말로 주문받는다’는 문구를 내걸었다. 손님이 “얼마?” 하고 반말로 물으면 “3000원”이라고 대꾸하는 식이다. 그런가 하면 이달 초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한 편의점 주인이 쓴 ‘부당 요구와 욕설을 하는 고객에게 절대 사과하지 마라. 막무가내 고객에겐 경찰 신고와 ‘맞쌍욕’을 허락한다’는 내용의 글이 회자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식당 종업원 아주머니에게 ‘이모’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부르면서 막 대해도 되는 양 반말을 내뱉은 적은 없는가? “이모, 여기 물 좀!”, “아이 짜증나, 이모 좀 빨리 달라니까!”, “이모, 여기 닦아줘!” 등등. 갑질 수모에 뒤돌아서서 속상해하는 ‘이모’는 누군가의 소중하고 귀한 가족이자 진짜 이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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