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들의 이야기-이금림] 드라마 작가의 길에서 만난 진정한 스승

입력 2016-05-02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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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림ㆍ드라마 작가

라디오 심야프로그램 스크립터 일자리를 얻게 된 것은 10년간 근무한 고등학교 교사직을 그만둔 1979년 가을이었다. 지금도 방송되고 있는 MBC 장수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가 나의 방송계 데뷔 프로그램이었다.

그동안의 교사 경험으로 주 청취자층인 청소년들과의 교감은 어렵지 않았다. 노련한 이수만, 송도영 두 진행자의 공도 컸다. ‘별이 빛나는 밤에’ 덕분에 다음 해 KBS 단막극 ‘KBS 무대’에서 드라마 대본을 써달라는 황송한 제의를 받게 되었고, 담당 PD가 참고하라며 준 단막극 대본 몇 편을 교과서 삼아 오영수의 ‘소라 나팔’을 천신만고 끝에 각색했다.

다행히 방송 평이 나쁘지 않았던 데다, 교사 출신이라는 프리미엄으로 ‘억척 선생 분투기’라는 시추에이션 청소년물까지 맡게 돼 그야말로 운 좋게 드라마 작가가 돼 버렸다. 언제부터인지 TV 드라마 작가가 인기 직종이 되어, 작가가 되려고 청춘을 바치고 있는 많은 후배들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너무나 쉬웠던 드라마 작가 데뷔였다.

좋은 세상에 태어난 덕분에 쉽게 데뷔는 했지만, 대본을 쓸 때마다 자신이 없고 부끄러웠다. 작가의식이나 작가관이 없는, 말장난에 불과한 작품을 써놓고 전파 낭비나 하는 것은 아닌지 자괴감이 들어 드라마가 방송되는 날엔 전국이 정전 사태라도 나서 내 작품을 보는 시청자가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랐다.

어떤 드라마를 써야 좋을지, 내가 제대로 된 대본을 쓰고 있는지 쓰면 쓸수록 괴롭고 어려웠다. 그런 나에게 드라마 작가가 무엇인지, 드라마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가르쳐 주신 분이 KBS 드라마국 PD 김수동 선생님이었다. 미니시리즈라는 장르가 없었을 때, 1983부터 11년간 방송했던 KBS 최장수 단막극 ‘드라마 게임’은 김수동 선생님에 의해 기획되었다. 드라마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질문하고 답을 유도하는 색다른 형태의 단막 드라마였다.

첫 방송부터 뜨거운 반향을 일으키며 ‘드라마 게임’은 신인 작가들이 가장 쓰고 싶어 하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김수동 선생님께서 함께 작품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연락을 주셨을 때, 나는 비로소 드라마 작가가 된 기분이었다.

KBS 별관 옆 좁은 카페에서 무려 10시간을 나는 얌전한 학생이 되어 김수동 선생님의 드라마 강의를 들었다. “좋은 드라마는 재미와 감동이 같은 비중으로 들어가 있어야 한다. 재미만을 추구하면 가벼워지고 감동만을 고집하면 무거워진다” “드라마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 곧 캐릭터이다. 사건을 위한 사건을 만들지 마라. 셰익스피어의 비극들을 봐라. 주인공 캐릭터가 사건을 만들어 내고 있지 않으냐. 억지 사건에 캐릭터를 끼워 넣지 않는다” “드라마는 소재가 문제기 아니라 그 소재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문제이다. ‘햄릿’이나 ‘오이디푸스 왕’ 같은 작품을 누가 불륜이라고 생각하겠느냐? 그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이다”…등등

선생님의 드라마 강의를 듣고 감동을 받아 쓴 첫 작품이 ‘육 개월 후’라는 단막극이었다. 작가에게 있어 원고를 제출하고 난 뒤 연출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가장 긴장되고 두려운 시간이다.

4남매가 중풍에 걸린 노모를 이런저런 이유로 모시지 못하고(어쩌면 모시지 않고) 요양원에 버리고(?) 오면서 “6개월 후에 꼭 모시러 오겠다”고 원장한테 공허한 약속을 하는데, 가만히 자식들을 지켜보고 있던 원장은 “부모님을 여기 모시고 온 자식들은 다 그렇게들 약속하지요. 하지만 다시 모셔가는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라고 끝을 낸 ‘육 개월 후’는 김수동 선생님께 면구스러울 만큼 과분한 칭찬을 들었다. 드라마 작가가 된 후 그렇게 기쁜 날은 없었다.

선생님을 통해 일본 대표 드라마 작가인 야마다 다이이치(山田太一) 선생과 그분의 작품을 알게 된 것도 내가 작품을 쓰는 동안 내내 나를 붙잡아 주는 힘이 되었다. 그것은 ‘진정성’이라는 화두였다.

1991년, 선생님과 함께 KBS 일일드라마를 기획할 때 노인문제, 노인의 치매를 다뤄보고 싶다 했더니 흔쾌히 동의해 주셔서 ‘옛날의 금잔디’를 쓸 수 있었다. 일일 드라마에서 노인문제, 더구나 무겁고 칙칙한 치매 노인을 다루는 것이 적절한지 논란도 많았고, 주요 일간지에 드라마 보기가 괴롭다는 칼럼까지 등장했지만, 치매라는 단어를 의학 용어로 정착시키는 계기가 되었고(당시에는 주로 노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최종 시청률도 24%를 상회했다. 전작이 3%에서 끝났으니 대박이 난 셈이다.

치매에 걸린 노인들을 뒷방에 숨겨놓고 가족들끼리만 전전긍긍하던 때라 ‘옛날의 금잔디’가 치매 문제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 공론화하는 데 일조했다며 보사부로부터 감사장도 받았다.

작가와 작가들의 작품을 존중하고, TV드라마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고 사회문제까지 짚어내야 한다고 가르쳐 주신 김수동 선생님. 그분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드라마 작가로서 큰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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