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의 눈] 갈등 깊을수록 ‘숙의의 場’ 다져야

입력 2023-10-1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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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 전문위원·언론학 박사

한국사회 안팎으로 위기 최고조
안보·경제위기에 정치대립 심화
다양한 견해 나누며 소통 꾀하길

영화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했다. 한성의 초입까지 쳐들어온 청나라 병사들은 도성을 둘러싼 험준한 산과 그 위의 산성(남한산성)을 맞닥뜨리고 난처해한다. 그런데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걱정마라. 그들은 안으로부터 무너질 것이다.” 당시 조선 조정은 명나라에 사대하고자 하는 당파와 청나라와 친교해야 한다는 당파 간에 치열한 갈등이 있었다.

청의 막강함을 아는 소장파는 청과의 타협을 주장했으나 정치적으로 그들의 의견은 열세였기 때문에 묵살당했다. 게다가 당시 왕이었던 인조는 갈등을 통합하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이끌어내는 리더쉽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조선은 정말로 안으로부터 무너졌다. 민중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청의 압도적 강세로 인해 조선의 병사들은 자결하거나 도망가 버렸다. 위기 속 갈등을 통제하지 못한 조선은 결국 국토와 백성이 유린당하며 치욕적인 패배를 맞게 되었다.

지금 대한민국 안팎으로 닥친 위기는 막중하다. 불과 며칠 전, 21세기에 일어났다고 믿기 힘든 참극이 또다시 발생했다. 무장단체 하마스에 의한 이스라엘 민간인 테러는 중동에 또다시 대규모 전쟁을 예고하고 있다. 이번 사태가 대한민국에 전하는 의미는 남다르다. 당장 북한이 하마스와 같은 도발을 감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적으로도 여러 위기와 함께 갈등이 켜켜이 쌓이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여야 대립으로 국가 시스템에 구멍이 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새로운 대법원장 임명을 두고 여야가 합의에 이르지 못해, 결국 사법부 최고 리더의 자리가 공석이 된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세대 간 갈등, 젊은 세대 내의 남녀 갈등이 극도로 심하다. 이런 갈등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의 원인이자 증상이다. 안보 위기, 경제 위기, 사회적 위기로 인한 정치적 견해의 대립이 심해지며, 이로 인해 눈앞에 닥친 위기를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더 큰 사회적 문제로 악화된다. 사법부 공백 사태, 저출산으로 인한 지역 소멸 같은 문제들 말이다. 그리고 또다시 이런 문제들로 인해 사회적 갈등이 더 커지는 악순환에 빠진 양상이다.

이런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위기와 갈등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관계라는 것 말이다. 태평성대일 때는 갈등이 비교적 순화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 하더라도 안전망이 있기 때문에, 다른 의견을 더 유연하게 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혹은 사회적으로 고립될수록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바꾸는 것이 어렵다.

이는 여러 연구 결과에서도 나타난다. 위기일수록 자신이 확보한 안전지대에서 나오기 어려우며, 다른 선택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위기 상황에서는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도출되기보다는, 힘이 있는 의견 집단이 다른 의견 집단을 묵살해 버리거나 비합리적이며 극단적인 의견이 득세하게 된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러한 경우의 가장 나쁜 사례를 본 적이 있다. 바로 ‘민주적 선출’을 통해 정권을 잡게 된 나치 독일이다.

현대 철학을 대표하는 사상가인 하버마스는 이런 위기와 갈등의 관계에 대해 깊이 고뇌했다. 나치 독일과 세계 2차 대전이라는 현대사의 가장 굵직한 위기를 겪은 그는 위기일수록 ‘숙의(熟議)’를 통해 다양한 견해가 자유롭게 오가며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싸움이 아니라 진정으로 의견을 주고받는 토론과 대화 말이다. 성별, 세대, 계층, 정치적 성향을 모두 가로지르는 ‘숙의의 장(場)’이 대중매체와 사회공동체에서 더욱 활성화되어 소통을 활발하게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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