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상장지수펀드(ETF) 시장에서 퇴직연금 계좌를 겨냥한 채권혼합형 ETF가 운용사 순위를 흔드는 새 변수가 됐다. 전체 ETF 시장에서 삼성자산운용과 미래에셋자산운용의 양강 구도는 여전히 공고하지만, 연금계좌에 100% 편입할 수 있도록 설계된 채권혼합형 ETF에서는 한 달 사이 운용사 1위와 4위가 뒤바뀌는 등 판도 변화가 일어났다.
12일 금융투자협회 종합통계포털에 따르면 채권혼합형 ETF 순자산총액은 지난달 13일 7조 7174억원에서 이달 11일 9조 8264억원으로 27.3% 증가했다. 같은 기간 주식형 ETF 증가율 25.2%를 웃돈다. 채권혼합형 ETF는 주식과 채권을 함께 담는 상품이다. 이 중 주식 비중을 50% 안팎으로 제한하고 채권을 절반가량 담은 상품은 퇴직연금 계좌에서 안전자산으로 분류돼 확정기여(DC)형·개인형퇴직연금(IRP) 계좌에 100% 편입할 수 있다. 위험자산 한도와 별도로 주식시장 노출을 늘릴 수 있다는 점이 연금 가입자 수요를 끌어들이고 있다는 분석이다.
가장 두드러진 곳은 KB자산운용이다. 11일 기준 KB자산운용의 채권혼합형 ETF 순자산총액은 지난달 13일부터 한 달 사이 92.5% 증가해 2조 3694억원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삼성자산운용은 1조 9815억 원에서 2조 3092억 원, 한국투자신탁운용은 1조 8675억원에서 2조 405억원, 미래에셋자산운용은 1조 2631억원에서 1조 3400억원으로 늘었다. 이에 따라 한 달 전 채권혼합형 ETF 부문 4위였던 KB자산운용은 11일 기준 1위로 올라섰다.
성장을 이끈 상품은 2월 26일 상장한 ‘RISE 삼성전자SK하이닉스채권혼합50’ ETF다. 해당 ETF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각각 25% 안팎으로 담고, 나머지를 국고통안채로 구성해 안전자산으로 분류된다. KB자산운용에 따르면 이 상품은 연금계좌 내 최대 100% 투자가 가능하다. 4월 한 달 동안 순자산은 7214억원에서 1조 4843억원으로 늘었고, 이달 12일 기준 순자산 규모는 1조 9009억원까지 커졌다.
삼성자산운용도 같은 흐름에 올라탔다. 지난달 7일 상장한 ‘KODEX 삼성전자SK하이닉스채권혼합50’ ETF는 이달 11일 기준 순자산총액 6487억원을 기록했다. 이 상품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각각 최대 25%씩 투자하고, 나머지를 국고채 등 국내 우량 채권으로 채우는 구조다. 관련 상품의 자금 유입에 힘입어 삼성자산운용은 운용사별 채권혼합형ETF 합산 순자산 기준 2위를 기록했다.
전체 ETF 시장에서는 여전히 대형 운용사의 지배력이 크다. 이달 11일 기준 삼성자산운용과 미래에셋자산운용의 합산 점유율은 71.51%로 시장의 7할 이상이다. 다만 중위권에서는 한국투자신탁운용(7.16%)과 KB자산운용(7.11%)의 점유율 격차가 0.05%포인트(P)까지 좁혀졌고, 이달 초 3위 자리가 두 차례 바뀌는 등 경쟁이 한층 격화하고 있다. 전체 시장 2위인 미래에셋자산운용이 채권혼합형 ETF에서는 4위에 그친 점도 일반 ETF 시장의 순위가 연금형 상품 시장에서는 그대로 이어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연금 ETF 경쟁은 더 치열해질 전망이다. 정부는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을 위한 구체 방안을 7월까지 확정하고 연내 관련 법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퇴직급여 사외적립 의무화도 함께 검토하고 있다. 퇴직연금 적립금이 운용사 수익 기반에 미치는 영향이 커질수록 연금계좌를 겨냥한 상품 기획력과 출시 시점이 운용사 순위 경쟁의 핵심 변수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배경이다.
김인식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과거 안전자산이 단순 채권·예금 중심이었다면, 현재는 채권 구조를 활용해 국내 성장주 편입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연금 ETF 시장이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