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인에게 '힐링'은 곧 '떠남'과 동의어가 되었다. 일상의 피로가 임계점에 다다르면 우리는 가장 먼저 인터넷에 비행기 표 가격을 검색한다. 최근 트립닷컴그룹이 발표한 데이터에 따르면, 한국 여성의 해외여행 횟수가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히 국경을 넘으며 안식을 찾는 셈이다.
하지만 수백만 원의 비용과 시간을 들여 먼 곳으로 탈출해야만 얻을 수 있는 평온이라면 그 유효기간은 너무 짧지 않을까?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키친'에는 단 한 걸음도 집 밖을 나가지 않고도 세상에서 가장 깊은 슬픔을 치유한 한 소녀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주인공 '미카게'는 유일한 혈육이었던 할머니를 잃고 고립 상태에 놓인다. 죽음의 정막이 감도는 집 안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은 '부엌'이다. 냉장고의 윙윙거리는 소리, 낡은 타일의 감촉, 요리 도구들이 만들어내는 생활의 소음 속에서 그는 비로소 안도감을 느낀다. 미카게는 부엌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잠을 청하며, 가장 좁고 익숙한 이 공간을 자신의 기지처럼 삼는다. 그에게 부억은 단순한 가사 노동의 장소가 아니라, 죽음의 공포를 막아주는 피난처였다.
그렇게 혼자 버티던 미카게는 우연히 알게 된 유이치의 제안으로 그의 집에 머물게 되고, 유이치와 그의 어머니 에리코와 함께 생활을 시작한다.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는 아니지만, 서로를 배려하며 일상을 나누는 이들과의 시간 속에서 미카게는 삶의 온기를 되찾아 간다. 그러나 에리코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다시 한 번 이들에게 깊은 상실을 안기고, 미카게와 유이치는 각자의 방식으로 슬픔을 견뎌낸다.
미카게가 부엌에서 위안을 얻는 것은 최근 한국의 소비 트렌드인 '레이어드 홈(Layered Home)'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휴식,업무, 취미, 운동 등 다양한 기능이 집이라는 공간에 층층이 더해지는 주거 트렌드이다.
인테리어 소품으로 분위기를 바꾸거나, 고성능 커피 머신으로 홈카페를 꾸미는 '홈코노미' 시장이 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행이 주는 일시적인 해방감보다 지속 가능한 정서적 안정을 선택하려는 경제적 의지가 반영된 결과다. 내 집 안의 작은 구석을 치유의 공간으로 바꾸는 데 드는 비용은 매일의 삶을 지탱하는 '정서적 자산'이 된다. 결국 진정한 경제적 휴식은 어디로 가느냐보다, 내가 매일 머무는 공간의 가치를 어떻게 높이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종종 행복이 아주 먼 곳 너머에 있다고 착각하곤 한다. 하지마 미카게에게 부엌이 그랬듯, 우리에게도 여권 없이 갈 수 있는 '나만의 기지'가 이미 곁에 있을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