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최단’ 길 개척...‘여자라서 안 된다’는 한계 설정 대신 ‘담대한 꿈’
커리어·육아 동시에 완벽 불가능...시기별 우선순위 선별해 꾸려야
이사회가 기업의 전략 파트너 되는 ‘선진 이사회 모델’ 한국 확산 목표
그는 2020년 교수로 인생 2막을 열었다. 캐나다 최고 명문대학으로 손꼽히는 토론토대 로트먼 경영대학에서 전략과 리더십, 젠더와 경제 등 분야에서 후학을 양성 중이다. 그의 생생한 현장 경험이 녹아든 강의는 학생들의 큰 호평을 받고 있다. 교수 재직 이후 5년 연속 강의 우수상을, 지난해엔 로트먼 경영대학 전체 교수 중 1~2명에게만 주어지는 최고 강의상인 ‘로저 마틴 우수 강의상’을 받았다. 컨설팅과 리더십에 대해 대해 누구보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기에 ‘K퍼스트우먼 : 한국 경제의 최초를 연 그녀들’ 인터뷰이로 낙점했다. 컨설팅계 기린아에서 이제는 든든한 글로벌 리더십 멘토가 된 그에게 물어볼 것이 참으로 많았다.

1996년 맥킨지 서울사무소에 입성한 후 비즈니스 애널리스트 직급에서 석사나 박사 학위를 갖춘 인력만 오를 수 있던 어소시에이트로 곧바로 승진하며 ‘최초’ 타이틀 랠리의 시작을 예고했다. 그는 맥킨지 서울사무소 1호 ‘사내 컨설턴트 부부’ 이기도 하다. 1999년 남편과 함께 하버드 경영대학원(MBA)에 동시 합격했다. 당시 남편에게는 “하버드 MBA에 도전하지 않겠다면 결혼도 다시 생각해보자”라며 밀어붙인 것도 김 교수다.
학업을 마친 후에 그는 더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렸다. 2005년 만 32세의 나이에 한국 여성 최초이자 최연소로 맥킨지 파트너에 오른다. 통상 어소시어트에서 파트너까지 6~8년 걸리는 과정을 단 4년 반 만에 달성한 것이다. 이는 당시 79년 맥킨지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초단기 승진이었고, 2012년에는 마침내 최고 직책인 시니어 파트너(당시 명칭 디렉터)에 오른다. 아시아 여성 중에는 일본인에 이어 두 번째 기록이다.
김 교수는 최근 토론토 자택에서 이뤄진 화상 인터뷰에서 맥킨지에서의 ‘최초’와 ‘최단’을 기록을 거듭 세울 수 있었던 배결로 크고 담대하게 꿈을 품은 것을 꼽았다.
“나는 ‘여자라서 안 돼’, ‘이 정도면 충분하지’ 같은 한계를 스스로에게 걸지 않았다”며 “오히려 두려움이 들 정도로 큰 꿈을 꾸는 것이 새로운 도전을 가능하게 했다”고 설명했다.
가령 김 교수는 격무 속에서도 기존의 전통적인 기업 대상 프로젝트를 벗어나 의료 체계에 대한 연구를 시작, 이를 기사화하고 ‘한국의료개혁 2010’이라는 책으로 엮어 의료 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정해진 틀과 관행이 강한 의료 분야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민감한 분야로 꼽혔지만 이를 외면하지 않은 것이다. 이를 계기로 맥킨지 서울사무소에 최초로 ‘헬스케어 부문’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고, 이는 김 교수가 파트너로 초고속 승진하는 데 결정적 발판이 됐다.
꿈은 치밀한 계획을 통해 공상이 아닌 현실로 만들었다. 김 교수는 스스로를 시쳇말로 ‘극J’(매우 계획적인 성향)라고 칭할 만큼 철저한 계획형 인간이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3년, 5년, 10년 계획과 월간 일간 계획을 세우고 돌이켜보는 습관을 길렀다”고 귀뜸했다.

김 교수가 커리어 내내 강조해온 가치는 ‘먼저 다가가는 용기’다. 성별에 따른 편견이 여전히 존재하던 당시, 이 용기는 그의 커리어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곤 했다.
입사 후 첫 프로젝트 킥오프 미팅 자리. 고객사 한 CEO는 회의에 참석한 유일한 여성인 김 교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통역사이신가요?” 김 교수가 “아닙니다, 저도 컨설턴트입니다”라고 답하자, 그는 잠시 멈칫한 뒤 이렇게 말했다. “여자 컨설턴트도 있네?” 발표를 마친 뒤, 그 CEO는 회의장을 나서며 남성 컨설턴트들과는 차례차례 악수를 나눴지만, 김 교수는 지나쳤다. 그 순간 김 교수는 먼저 악수를 청했다.
김 교수는 “그분이 악의적으로 그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여성 컨설턴트가 너무 낯설었을 것”이라고 그날을 회상했다. 그러면서 “그럴수록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익숙하지 않으면, 내가 익숙하게 만들어야죠. 그렇게 하나씩 편견을 깨는 것이 저에게 더 맞는 방식이 됐다”라고 말했다.
아무리 노련한 경영 컨설턴트라도 고객을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김 교수는 그 핵심 열쇠로 진정성을 제시했다. 김 교수는 컨설팅 수업에서 때 “고객은 컨설턴트가 본인의 회사의 성공에 대해 얼마나 ‘케어’한다고 믿기전까지는 그 컨설턴트가 얼마나 많이 아는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이유다.
김 교수는 “컨설턴트로서 물론 실력과 전문성을 갖추어야 하지만 컨설턴트가 당신의 문제를 진심으로 해결하고 싶다는 간절함과 진정성이 느껴져야 고객사는 비로소 머리와 가슴으로 권고안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회상했다.
그는 또 그러한 진정성은 말보다 경청을 통해 전달된다고 했다. 실제로 많은 고객은 스스로 해결책을 알고 있지만, 복잡한 제약 조건 탓에 실행을 못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는 경청이 해답의 실마리를 푸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다”라고 짚었다. 이런 식으로 신뢰가 쌓이면 변화와 실행의 출발점에 서게 된다고 한다. 김 교수는 “고객이 ‘이 사람이 우리 회사를 정말 잘 되게 하려고 하는구나’라는 믿음을 갖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하나의 팀처럼 움직이게 된다”고 말했다.
김 교수와의 인터뷰는 3시간이 넘도록 이어졌지만, 내내 따뜻한 눈빛과 부드러운 어조, 그리고 한결같은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몸에 단단이 밴 태도와 진중한 자세는 말보다 더 강하게 그의 철학을 보여줬다.
김 교수는 2003년, 만 30세에 아들을 낳았다. 서울사무소에서 재직 중 출산을 한 최초의 컨설턴트가 됐다. 승진이 늦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인생은 마라톤’이라는 생각으로 출산을 기꺼이 선택했다.
하지만 그 역시 커리어와 육아를 동시에 꾸려나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김 교수는 “아이를 낳은 후 초반에는 일을 소홀히 한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 두 가지 모두 완벽하게 하려고 애썼다”면서 “하지만 이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떠올렸다.
그러면서 “언제나 최고의 엄마, 최고의 아내, 최고의 컨설턴트가 될 수는 없다”면서 “매순간 최고가 되려는 강박은 오히려 커리어상에서 도전보다는 안전한 길을 택하게 하거나 중도에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했다. 이어 “그보다는 각각 그 시기에 맞게 중점을 둘 부분을 우선 순위화하면서 평균적으로 지속적으로 잘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면서 일과 삶의 균형을 고민하는 많은 워킹맘들에게 위로와 방향을 제시했다.

김 교수는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먼저 “이사회가 기업의 전략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캐나다에서 여러 조직과 기업의 이사회의 부의장 및 위원장을 맡으며, 한국에서 단순히 '거수기' 역할에 머물고 있다는 이사회가 전략적 가치 창출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체험했다고 한다. ”이러한 ‘선진 이사회 모델’을 한국에 실질적으로 도입하고 확산시키는 것이 자신의 다음 커리어 목표 중 하나“라고 소개했다.
특히 전략 수립 초기 단계부터 이사회가 논의에 참여하고, 경영진과 협력하며 전략의 질을 높이는 접근 방식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이사회는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경영진 고유의 역할은 존중하면서 적절한 질문을 던져 경영진의 사고를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며 “이는 현재 한국 이사회 문화와 매우 다른 점”이라고 언급했다.
또한 그는 이사회 혁신을 위한 방식으로 단순한 교육이나 강연보다는, 실제 이사회 일원으로 참여해 실천적 사례를 만들어가는 방식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이론이나 정책 제안만으로는 변화가 어렵다. 실제로 적용하고, 그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훨씬 더 큰 설득력을 가진다”고 역설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세계 각국의 인재들이 찾는 MBA 과정을 한국에 개설하는 것도 오랫동안 품어온 꿈”이라며 맑게 웃어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