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은 오랫동안 비용으로 여겨졌다. 공장에서 쓰고 버리는 물, 정수장에서 처리해야 하는 물, 오염되면 정화 비용이 드는 물이었다. 그러나 기후위기와 AI 산업 확산은 물의 의미와 가치를 바꿨다. 반도체 생산엔 초순수가 필요하고, 데이터센터에는 냉각수가 필수다. 산업단지는 폐수를 다시 쓰는 기술을 찾아 사용하고, 기업은 난분해성 오염물질을 줄일 방법을 찾는다. 물은 처리 대
상이 아니라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전략 자원이 됐다.
현장에서 만난 중소기업들은 물 사업화에 팔을 걷었다. 폐수를 정화해 다시 쓰는 기술, 과불화화합물(PFAS) 같은 난분해성 물질 분해 기술, 실시간 수질 감지 센서, 반도체 공정에 필요한 초순수 설비까지 기술의 방향은 분명하다.
문제는 기술 자체보다 시장 진입이다. 중소기업이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개발해도 현장에 적용한 사례가 부족하면 납품 문턱을 넘기 어렵다. 레퍼런스가 없어서 실증을 못 하고, 실증이 없어서 레퍼런스를 만들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정부가 물산업 연구개발, 사업화, 해외 진출 지원 정책을 추진하는 건 반가운 일이다. 다만 중소기업에 더 많은 관심이 지원이 절실하다. 물산업은 기술개발만으로 성장하기 어렵다. 상수도, 하수처리, 산업용수, 초순수처럼 안전성 및 안정성이 중요한 만큼, 시장에선 첫 적용 사례가 곧 신뢰다. 공공기관과 대기업의 검증된 기업 선호는 당연하다. 하지만 이 구조가 고착되면 신기술을 가진 중소기업은 늘 문밖에 머문다.
물산업 육성의 핵심은 지원금보다 시장을 창출하는 데 있다. 실증 장소를 제공하고 검증 결과를 조달·납품으로 연결해 국내 적용 사례가 해외 진출의 발판이 되도록 해야 한다. 기술을 개발한 기업에 “증명해오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증명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줘야 한다. 물 재이용과 오염물질 처리, 초순수 국산화는 개별 기업의 문제가 아니다. 산업 공급망과 환경 대응, 국가 경쟁력이 함께 걸린 과제다.
‘물을 자원으로 보자’는 말이 더 이상 구호에 머물러선 안 된다. 물을 자원으로 보려면 물기술을 가진 기업도 산업 자산으로 봐야 한다. 중소 물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첫 시장을 만들지 못한다면 물산업 육성은 선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물 부족 시대에 필요한 것은 기술이 현장에 닿는 시스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