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 위험성 인지 여부 따져⋯은행 책임 인정은 제한적
판매사 책임 확대 기조-법원 판단 차이⋯“현장서도 고민”

금융당국이 소비자보호 강화를 이유로 금융회사 책임 범위를 넓히고 있지만 법원은 여전히 투자자의 자기책임 원칙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투자자의 투자 경험과 상품 이해도, 위험 인지 여부 등을 세밀하게 따지면서 판매사 책임을 제한적으로만 인정하고 있어서다. 판매사 책임 확대 기조와 실제 소송에서의 법원 판단 사이 간극이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8일 본지가 최근 3년간(2024년~2026년 5월) KB국민·신한·우리·하나 등 4대 시중은행이 판매한 금융투자상품 관련 민사소송 가운데 부당이득금 반환 및 손해배상 청구 사건 판결문 57건을 전수 분석한 결과, 투자자가 주장한 판매사 책임이 전부 인정(원고 완승)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배상 책임이 일부라도 인정된 사례를 모두 합쳐도 21건(36.8%)에 그쳤다. 소송을 제기한 투자자 3명 중 2명은 푼돈 한 푼 못 받고 패소했다는 뜻이다.
특히 최근 들어 법원의 잣대는 한층 더 엄격해지는 추세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선고된 사건 28건 중 은행 책임이 일부라도 인정된 사례는 단 1건에 불과했다. 2024년에는 18건 중 11건, 2023년에는 11건 중 9건에서 은행 책임이 일부 인정됐던 것과 비교하면 법원이 은행의 손을 들어주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졌다. 당국의 압박에 은행들이 고개 숙이는 것과 달리, 법원에서는 투자자 책임 전가에 제동을 걸고 있는 셈이다.
법원은 투자자가 입은 손실 규모 자체보다, 투자 당시 위험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는지를 중심에 두고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투자자의 과거 투자 경험과 상품 가입 이력, 투자설명서 및 위험고지 자료 교부 여부, 투자성향 진단 절차, 사후 모니터링 실시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설명의무 위반 여부를 가렸다.
실제 판결문을 보면 재판부는 투자자가 가입 과정에서 위험성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지, 사후 모니터링에서 상품 내용과 투자위험을 이해했다고 답변했는지 등을 주요 판단 근거로 삼았다. 투자자가 관련 질문에 “예”라고 답한 사실을 근거로 은행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사례가 많았다.
투자자가 가입 서류를 직접 작성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사건조차 사후 모니터링 과정에서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구가 기각됐다. 올해 1월 선고된 홍콩 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투자금 반환 소송에서도 재판부는 투자자가 이전에 은행을 통해 다양한 금융상품에 가입한 경험이 있다는 점을 들어 은행 책임을 전면 부인했다.
반면 은행 책임이 일부 인정된 사건에서는 은행 측이 투자자의 오인을 유발한 정황이 명백하게 입증됐다. 법원은 지난해 10월 한 시중은행이 해외펀드를 판매하며 “100% 신용보강보험에 가입돼 있어 원금이 보장된다” “전쟁만 나지 않으면 원금을 받을 수 있다”는 식의 확정적 표현만 강조하고 손실 가능성 안내를 소홀히 한 점을 인정해 투자자의 손을 들어줬다.
다만 이처럼 불완전판매 정황이 뚜렷한 사건조차 법원은 사기나 착오에 의한 계약 취소, 적합성 원칙 위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설명의무 위반과 부당권유 행위에 한해서만 은행의 책임을 물었고, 이마저도 투자자의 과실과 투자 경험을 감안해 손해액의 66% 수준만 배상하도록 제한했다.
결국 단순한 설명 부족만으로는 은행에 책임을 묻기 어려우며, 핵심 위험 정보가 완전히 누락됐거나 상품 구조에 대한 사기성 오인을 유발한 경우에만 극히 제한적으로 배상 명령이 떨어지고 있다. 금융당국의 포퓰리즘성 소비자보호 강화 기조 속에서도 법원은 시장경제의 근간인 ‘자기책임 원칙’의 경계를 쉽게 허물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판매사 책임 확대와 자기책임 원칙 사이의 간극은 현장에서도 중요한 고민”이라며 “핵심은 책임을 누구에게 둘 것인가보다 판매 과정이 얼마나 투명하고 적정하게 이뤄졌는지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느냐에 있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