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고기부터 버스까지 다 팔았다”
위기의 레거시 시장서도 버틴 생존력
26년 DB로 플랫폼 ‘세미마켓’ 재도전

AI 시대가 열리며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의 시선은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 고대역폭메모리(HBM), 2nm(나노미터·1nm=10억분의 1m 이하) 초미세공정에 쏠려 있다. 그러나 그 화려한 조명 뒤편에서는 20년 넘은 장비와 단종된 부품을 붙잡고 공장을 유지하는 기업들도 존재한다. 서플러스글로벌은 바로 그 시장에서 성장해온 기업이다.
26년째 반도체 중고 장비 시장을 지켜온 김정웅 서플러스글로벌 대표는 최근 회사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바꾸겠다는 결심을 했다. 중고 장비 거래 기업을 넘어, 반도체 생태계 전체를 연결하는 플랫폼 회사로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이를 위해 수백억원대 투자를 이어가며 ‘세미마켓(SemiMarket)’이라는 플랫폼 사업에 사실상 회사의 미래를 걸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도전이 완전히 새로운 시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김 대표는 이미 26년 전 ‘기업 간 전자상거래(B2B)’라는 개념조차 낯설던 시절, 비슷한 꿈을 꿨다가 처절한 실패를 경험했다. 당시의 실패와 생존 경험을 바탕으로 26년간 방대한 데이터를 축적했고 이제 다시 플랫폼 전략으로 쌓아 올리는 중이다.
김 대표는 “우리는 단순한 중고 장비 회사가 아니다”라며 “AI 시대에 맞춰 반도체 산업 전체를 연결하는 플랫폼 기업으로 가는 것이 회사의 목표”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1990년대 후반 인터넷 붐이 시작되던 시절, 인터넷 기반 비즈니스 모델에 깊은 관심을 가진 기억을 꺼내들었다. 당시 시장의 관심은 네이버와 다음 같은 기업-소비자 거래(B2C) 플랫폼에 집중돼 있었지만, 김 대표는 반대로 기업 간 거래 시장인 B2B에 주목했다. 이른바 ‘기업들의 이베이’를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김 대표는 “그 당시 B2B 전자상거래 회사가 300개 가까이 생겼는데 거의 다 망했다”며 “기업 간 거래는 신뢰성 검증이 굉장히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도 글로벌하게 성공한 B2B 전자상거래 모델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고 말했다.
사업 초기 상황은 더욱 처절했다. 첫해 직원은 40명이었지만 매출은 2억8000만원에 불과했다. 외부 투자로 받은 23억원은 순식간에 바닥났고 회사 통장에는 4000만원 정도만 남았다고 한다.
김 대표는 살아남기 위해 닥치는 대로 사업을 했다. 돼지고기 유통부터 네트워크 장비, 버스 사업까지 손대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 악착같이 버티며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는 어느 순간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이것저것 모두 손대다가는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김 대표는 “철강, 화학, 섬유, 건설 등 여러 산업을 봤는데 당시 반도체 산업 성장률이 13~15% 수준으로 굉장히 높았는데, 여기에 대단한 혜안이 있었던 건 아니다”라면서 “그냥 성장률만 보고 들어간 거다. 참 단순무식했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회사가 지금의 서플러스글로벌이다. 서플러스글로벌은 이후 글로벌 반도체 중고 장비 시장에서 빠르게 존재감을 키웠다. 현재까지 전 세계 6000개 기업에 약 6만대의 장비를 공급했고, 거래 규모는 연간 수천억원 수준에 달한다. 김 대표는 “동종 업계 회사가 전 세계에 1000개 정도 있지만 우리가 시장점유율 기준으로 글로벌 1위”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김 대표는 최근 시장 상황을 두고 “솔직히 말하면 지금 회사는 큰 위기”라고 표현했다.
문제는 시장의 중심이 첨단 공정으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AI 반도체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글로벌 투자와 기술 혁신이 첨단 공정에 집중되고 있지만, 반대로 레거시(성숙공정) 시장은 장기 불황에 빠져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반도체 업황이 좋아 보이지만 사실 첨단 시장 이야기”라며 “28나노 이하 성숙공정과 관련된 레거시 시장은 사상 최악 수준의 환경”이라고 진단했다.
레거시 시장이 어려워진 배경으로는 코로나19 시기 과잉 투자 후폭풍과 미중 갈등을 꼽았다.
코로나 시기 성숙공정 장비 투자가 급증했지만 이후 수요 둔화로 공급 과잉이 심화됐고, 최근에는 중국 업체들이 빠르게 성장하며 시장 경쟁까지 치열해졌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 나우라 같은 기업들이 급성장하면서 중국산 장비와 직접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우리는 지금 삼각파도를 동시에 맞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업황 악화는 숫자로도 나타난다. 서플러스글로벌은 지난해 매출이 약 17% 감소했다. 다만 김 대표는 “경쟁사들은 50~70%까지 매출이 줄었다”며 “올해 상반기에도 비슷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점은 김 대표가 이 같은 위기 속에서도 레거시 시장의 중요성은 오히려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모두가 첨단만 이야기하지만 산업 전체는 레거시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전력반도체와 디스플레이구동칩(DDI), 이미지센서(CIS) 등을 들었다. 이들 제품은 최첨단 미세공정보다 성숙공정 기반 생산 비중이 높다. 특히 AI 데이터센터 확대로 GPU 수요가 급증하면서 그 뒤에 들어가는 전력반도체 수요 역시 함께 늘어나고 있다는 설명이다.
김 대표는 “GPU 하나 뒤에는 전력반도체가 수십 개씩 들어간다”며 “AI 시대라고 해서 모든 반도체가 첨단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특히 20년 이상 운영되는 8인치 팹들의 경우 단종 부품 문제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장비 제조사조차 유지보수를 중단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첨단 시장은 돈도 많고 인재도 많다”며 “하지만 레거시 시장은 공급망 문제가 심각하다. 누군가는 이 시장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플러스글로벌이 최근 세미마켓 플랫폼 사업에 집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미마켓은 반도체 장비와 부품, 고객 데이터를 기반으로 거래와 공급망을 연결하는 플랫폼 사업이다. 오프라인 중심이었던 기존 중고 장비 사업을 온라인 플랫폼 중심으로 확장하겠다는 전략이다.
김 대표는 “26년 전 실패했던 B2B 플랫폼 모델을 이제 다시 꺼내고 있다”며 “당시에는 너무 빨랐지만 지금은 데이터와 AI 환경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실제 회사는 세미마켓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이다. 올해 여름에는 세미마켓 전용 건물이 준공될 예정이며, 회사는 여기에만 약 700억원 규모 투자를 진행할 계획이다. 웹사이트와 플랫폼 고도화 작업에도 지속적으로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그는 “회사 내부 인력의 약 30%가 세미마켓 사업에 투입돼 있다”며 “우리는 사실상 회사의 미래를 여기에 걸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AI 기반 자동화 시스템 구축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대표 사례가 온라인 입찰 시스템이다. 과거에는 사람이 직접 구매 가능 고객을 찾고 연락해야 했지만 최근에는 AI를 활용해 잠재 구매 기업을 자동으로 분석하고 추천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김 대표는 “한 입찰 건의 경우 처음에는 가격이 너무 낮아 유찰 수준이었는데, AI 기반으로 고객 분석과 상품화를 다시 한 뒤 2차 입찰 가격이 70% 가까이 뛰었다”며 “최근에는 AI 활용 효과가 실제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회사는 내부적으로 ‘AI 네이티브 기업’ 전환도 선언했다. AI 에이전트를 활용해 거래처 조사, 고객 발굴, 판매 가능성 분석 등을 자동화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김 대표는 “우리는 26년 동안 축적한 데이터가 있다”며 “AI는 결국 데이터가 핵심인데, 반도체 장비와 고객·부품 데이터 측면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자신한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과거 금융위기 시절 경험을 떠올리며 지금도 회사가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201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반도체 전시회 ‘세미콘 웨스트’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당시 회사 상황은 극도로 어려웠고 그는 백팩 하나만 메고 미국으로 향했다.
낮에는 고객사를 만나고 밤에는 미팅을 이어갔다. 호텔방으로 돌아온 뒤에는 새벽까지 이메일을 보냈다. 그는 “오전 8시에 다시 일어나 같은 일을 반복했다”며 “그 3박4일이 정말 절박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그는 현지에서 총 200만달러 규모 계약 7~8건을 성사시켰다. 그는 “당시 회사에는 정말 단비 같은 계약이었다”며 “그때 치열하게 공부하고 버틴 경험이 지금 회사의 자산이 됐다”고 회상했다.
김 대표는 앞으로도 세미마켓과 AI 기반 플랫폼 전략에 수백억원 규모 투자를 이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반도체 시장에서는 매년 엄청난 규모 장비가 사용되고 폐기되지만 실제 유통되는 규모는 매우 작다”며 “아직 활용 가치가 높은 장비가 시장에서 너무 낮은 가격으로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결국 우리는 버려진 장비와 부품, 데이터를 다시 연결하는 일을 하고 있다”며 “26년 전 실패했던 플랫폼의 꿈을 AI 시대에 다시 현실로 만들고 싶다”고 강조했다.
김 대표는 사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 시작한 2012년, 발달장애인 가족 지원을 위한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하고 사회공헌 활동에도 나섰다. 현재 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발달장애 가족 치유와 교육 프로그램 운영, 장애 인식 개선 활동 등을 이어오고 있다. 매년 열리는 ‘오티즘 엑스포(Autism Expo)’에도 지속적으로 참여 중이다.
그는 “회사가 성장하며 사회로부터 정말 많은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며 “기업 역시 결국 사회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인 만큼 의미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사업도 결국은 사람과 산업을 연결하는 일”이라며 “앞으로도 반도체 생태계에서 필요한 연결 역할을 계속 해나가고 싶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