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표준은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시장의 질서를 만든다. 서로 다른 기업의 제품과 서비스가 연결되고 호환되기 위해서는 공통의 기술 규칙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규칙을 구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특허가 바로 표준필수특허(SEP: Standard Essential Patent)다.
그동안 표준특허는 주로 이동통신 분야의 이슈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만 볼 수 없다. 연결성과 호환성이 경쟁력의 핵심이 되면서 자율주행, 커넥티드카, 스마트팩토리, 디지털 헬스케어 등 다양한 산업으로 그 영향력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준특허 권리자는 강한 배타적 권한을 갖지만, 동시에 FRAND(공정·합리적·비차별적) 조건으로 라이선스를 제공해야 한다. 표준특허는 독점적 권리이면서도 산업 생태계의 개방성과 접근성을 함께 요구받는, 일반 특허와는 다른 성격의 권리다.
표준특허의 중요성이 커지자 각국도 주도권 확보에 적극 나서고 있다. 유럽연합(EU)은 표준특허 라이선스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규정 제정을 추진했지만, 이해관계 충돌 속에 2025년 이를 철회했다. 영국은 글로벌 FRAND 조건을 자국 법원이 판단할 수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며 분쟁 해결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중국은 자국 산업 보호 기조 아래 로열티 산정에 적극 개입하고 있고, 일본도 표준특허 소송 가이드라인을 정비하며 제도 경쟁에 나서고 있다. 미국 특허청 역시 표준특허 워킹그룹을 출범시키며 정책 대응을 본격화했다. 이제 표준특허 분쟁은 단순히 특허권 유무를 다투는 차원을 넘어, 어느 국가의 법원과 제도를 활용하느냐가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 같은 변화는 한국 기업에도 남의 일이 아니다. 한국은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이지만, 표준특허 분야에서는 여전히 로열티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를 바꾸려면 표준화 과정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기술이 표준으로 채택되기 전에 관련 특허를 선점하고, 이를 표준과 연결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표준화 활동은 더 이상 연구개발(R&D)의 부수적 절차가 아니라, R&D와 특허 전략을 잇는 출발점이다.
기술 패권 경쟁의 본질은 결국 누구의 기술이 표준이 되느냐에 달려 있다. 표준특허의 핵심은 단순한 권리 보유가 아니라 시장 진입, 라이선스 협상, 사업 확장의 조건을 누가 유리하게 설계하느냐에 있다. 따라서 기업은 분쟁이 발생한 뒤 대응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사업 초기부터 표준화 참여, 특허 포트폴리오 점검, 라이선스 전략 수립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표준이 산업의 언어라면, 표준특허 전략은 앞으로 기업 경쟁력의 문법이 될 것이다.
고은주 삼성벤처투자 투자심사역·변리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