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무버 기회…미·일은 이미 물밑 접촉”
북극 개발 프로젝트 300개…무르만스크 투자 공백

권영대 EY한영 산업연구원장은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북극항로는 단순한 해상 운송 루트가 아니라 불확실성 시대의 공급망 ‘리던던시(Redundancy·대체 경로)’ 전략”이라며 “유럽 기업들이 빠진 북극 개발 프로젝트에서 경쟁 공백이 발생한 만큼 지금이 ‘퍼스트무버’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권 원장은 최근 러시아 국영 원자력기업 로사톰의 초청으로 직접 러시아를 방문, 북극 개발의 사령탑인 ‘북극권 이니셔티브(ACCNI)’ 및 로사톰 관계자들과 다양한 사업 기회에 대한 회의를 진행했다.
권 원장은 북극항로 논의의 출발점을 글로벌 공급망 패러다임 변화에서 찾았다. 전통적으로 글로벌 기업들은 공급망을 ‘QCD(품질·비용·납기)’ 기준으로 평가해왔다. 품질을 유지하면서 비용을 낮추고 정시에 납품하는 구조가 가장 효율적인 공급망으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국제 정세는 이러한 판단 기준을 흔들고 있다.
권 원장은 “국제 정세가 안정적일 때는 QCD 기준이 맞았다”며 “하지만 지정학적 긴장과 진영 경쟁이 강해진 지금은 공급망 리던던시, 즉 대체 경로 확보가 훨씬 중요한 시대가 됐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주요 해상 항로는 남중국해, 믈라카해협, 호르무즈해협, 인도양 일대 등 분쟁 가능성이 큰 지역을 통과한다”며 “팍스 아메리카나 시기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처럼 불확실성이 높을 땐 이해관계가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북극항로의 지정학적 변수는 상대적으로 단순하다는 분석이다. 권 원장은 “기존 항로는 이해관계자가 너무 많지만 북극항로는 사실상 러시아 하나가 핵심 변수”라고 짚었다. 기존 항로보다 이해관계 구조가 단순하다는 점에서 러시아와의 협력 구도가 확보될 경우 불확실성을 관리할 여지가 있다는 게 권 원장의 설명이다.
러시아는 북극항로를 단순한 해상 통로가 아니라 대륙 간 물류 벨트로 확장하는 전략도 추진하고 있다. 북극항로(동서축)와 남북회랑(INSTC·러시아-이란-인도 연결)을 결합해 유럽·중동·아시아를 연결하는 복합 물류 네트워크를 구축하겠다는 구상이다. 이 구상이 현실화될 경우 극동·북극·중동을 잇는 새로운 에너지 공급망도 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될 경우 러시아 북극항로와 남북회랑을 통해 에너지 공급 경로를 우회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다.
러시아는 북극항로 활성화를 위해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도 추진 중이다. 현재 공개된 프로젝트만 약 300개에 이른다. 권 원장은 “러시아는 한국을 ‘선도 참여자(Leading Participant)’로 언급하며 협력을 제안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무르만스크 개발 프로젝트에서 협력 요청이 많다고 한다. 무르만스크는 북극항로의 유럽 관문인데,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 기업들이 철수하면서 투자 공백이 발생했다.
그는 “퍼스트무버 어드벤티지는 경쟁 공백에서 나온다”며 “중국은 이미 적극적으로 진입하고 있고 미국과 일본도 물밑 접촉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한국은 러시아와의 네트워크가 사실상 단절된 상태라고 설명했다. 권 원장은 “제재가 풀린 뒤 사업을 검토하겠다는 접근은 현실적이지 않다”며 “투자는 나중에 하더라도 사전 검토와 네트워크 구축은 지금부터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국과 러시아 협력 가능성이 가장 큰 분야로는 자원과 에너지가 꼽힌다. 러시아는 희토류, 리튬, 천연가스 등 풍부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한국은 자본, EPC(설계·조달·시공), 양산 기술 등 산업 역량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권 원장은 “러시아는 자원과 기초 기술이 강하고 한국은 자본과 양산 기술, 운영 역량이 강하다”며 “상호 보완적인 구조가 형성돼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러시아 측은 제재 환경을 고려해 자원 교환 방식(바터) 등 다양한 협력 방식에 열려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권 원장은 북극항로를 단순한 운송비 비교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톤당 운송비가 수에즈보다 싸냐 비싸냐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지금은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높은 시대”라고 말했다. 북극항로는 공급망 리스크에 대비하고 에너지 안보와 전략 자원 확보를 염두에 둔 ‘전략적 보험 항로’라는 설명이다.
권 원장은 마지막으로 “북극항로 협력은 ‘3년 안에 가능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3년 안에 시작해야 하는 문제”라며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한국은 북극항로와 신자원 경쟁에서 뒤처질 가능성이 크다”고 역설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