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창] 달콤함은 마음에 있다

입력 2026-02-2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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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성 서예가/한국미협 캘리그라피 분과위원장

내가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시골에서 지낸 시간은 반 년 남짓이지만 그 기억은 유난히 또렷하다.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어 초등학교 5학년 여름, 나는 동생과 함께 안성의 조부모 댁에 맡겨졌다.

전학 첫날 누군가 내 책상서랍에 찐 계란과 고구마, 포도 한 송이를 넣어두었는데 그때의 마음 떨림이 50여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선하다. 등굣길은 멀었다. 논둑을 돌아 낮은 산길로 접어들면 가을 밭에는 흙 위로 파란 무가 한 뼘이나 솟아 있었다. 함께 걷던 동네 오빠들이 발로 툭 차 껍질을 벗겨 건네준 무의 달큰하고 시원한 맛은 지금껏 잊히지 않는다.

하굣길에는 풋콩을 따고 수수를 꺾어 어딘지 아득한 곳에서 불에 익혀 입이 까맣게 되도록 먹었다. 어느 날은 닭 둥지에서 꺼낸 알과 도랑에서 잡은 미꾸라지를 젖은 신문지에 싸 구워 먹던 날도 있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이른 가을날 고등학생이던 막내 고모는 어린 조카들을 생각해 아직 여물지 않아 손가락만 한 고구마를 캐왔다가 삼촌에게 병아리를 키우던 바소쿠리로 등을 맞았다. 맞으면서도 짓던 머쓱한 웃음이 오래도록 남는다.

할머니는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찬물을 길어 올려 아끼던 당원을 녹여 주셨다. 화롯불 위 까맣게 그을리고 찌그러진 냄비에 보글보글 끓던 청국장, 희나리 고춧가루로 버무려 담근 허옇지만 향긋한 달랑무 김치 맛은 우리 형제들이 늘 밥을 잘 먹지 않아 걱정이시던 엄마를 무색하게 하였다.

새로운 먹거리 중 으뜸은 조청 맛이었다. 눈이 소복이 쌓인 고추밭 위로 햇살이 쨍하게 내려앉던 날, 옆 동네로 시집간 큰고모 댁에 세배를 갔다. 화롯불 위 석쇠에 굳어진 찹쌀 인절미를 구워 조청을 곁들여 내주셨는데, 나는 떡은 조금씩 베어물고는 조청만 자꾸 핥았다. 달고 끈적한 맛이 이전에 집에서 흔히 먹던 초콜릿이나 캔디와는 달랐다. 일가 아저씨들이 잡아온 꿩을 다져서 빚은 떡국 속의 매콤했던 만두와 더불어 내 유년의 가장 또렷한 설 맛이다.

봄이 오기 전 나는 혼자 도시로 돌아왔다. 살림을 도울 손이 필요해, 동생을 두고 떠나던 날의 기쁨과 미안함이 뒤섞인 마음과, 전학 온 나를 따뜻하고 순박하게 대해주던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는 안타까웠던 마음이 기억난다. 내가 평생 겪은 시골살이는 그뿐이다. 소동파의 말처럼 ‘人間有味是淸歡’ (인간유미시청환·사진)이라 했다. 사람 사는 세상의 참 맛은 맑고 담박한 기쁨에 있다는 뜻일 것이다.

나는 안다. 짧았지만 그때의 맛과 기억이 내가 쓰는 글씨 한 획 속에도 살아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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