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통제하는 미국 BIS 인력 턱없이 부족
❝AI 칩 최종 사용자 모두 확인은 불가능❞

미국이 인공지능(AI) 패권을 둘러싼 경쟁에서 중국을 견제하고자 2022년부터 엔비디아의 고성능 반도체에 대한 수출 제한을 강화해왔지만 여러 우회 경로를 통해 엔비디아 칩이 중국 시장에 유입되고 있다고 최근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집중 조명했다.
말레이시아 남부 조호르 지역은 중국으로 엔비디아의 칩을 이송할 수 있는 편리한 ‘뒷문’으로 꼽힌다. 싱가포르와 국경을 맞댄 이 지역은 데이터센터의 허브로 떠오르고 있다. 땅값과 전기요금이 저렴하고, 허가를 받기도 싱가포르보다 쉽기 때문이다. 이에 아마존ㆍ구글ㆍ마이크로소프트(MS)ㆍ오라클 등 미국 주요 클라우드 업체들이 모두 이곳에 진출해 있다. 틱톡의 모회사 바이트댄스를 포함한 대형 중국 기업들도 이곳에 클라우드 용량을 임대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말레이시아에서 클라우드 용량을 임대하면, 중국 내로 반입할 수 없는 칩에도 접근이 가능하다”면서 “말레이시아 데이터센터 운영업체들은 미국 수출 규정을 준수하며, 블랙리스트에 오른 기업에는 용량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우회 방법은 간단하다. 현지 기업을 설립하면 중국 기업이 제한된 칩을 확보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부동산 컨설팅업체 나이트프랭크에 따르면 조호르 지역의 전체 데이터센터 용량(완공ㆍ공사ㆍ계획)은 2021년 초 10㎿(메가와트)에서 작년에는 1500㎿ 이상으로 급증했다. 또 컨설팅업체 세미애널리시스는 2027년 조호르의 예상 데이터센터 용량의 거의 절반이 엔비디아와 같은 AI 프로세서를 포함할 것으로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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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는 밀수 가능성도 제기했다.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싱크탱크 ‘AI정책전략연구소’의 에리히 그루네발트는 지난해 중국의 AI 모델 학습 용량 중 10%에서 50% 사이가 밀수된 미국 칩으로 이뤄졌다고 추정했다.
특히 싱가포르를 통한 밀수가 활발히 이뤄지는 것으로 의심했다. 엔비디아의 고성능 칩은 주로 세계 최대 칩 제조업체 TSMC의 대만 공장에서 생산된다.
2022년 미국의 첫 수출 통제 이전까지 엔비디아 매출의 약 22%는 중국에서 발생했다. 이후 이 비율은 13%로 하락했다. 같은 기간 최종 사용자가 거의 없는 싱가포르로의 매출은 두 배 이상 증가해 전체의 약 18%를 차지하게 됐고, 미국 다음으로 큰 시장이 됐다.
이에 엔비디아는 이 변화가 일반적인 거래 관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많은 고객이 싱가포르에서 송장을 발행하지만, 제품은 허가된 지역으로 선적된다는 것이다. 싱가포르에서 판매된 칩 중 현지로 납품되는 비중은 2%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싱가포르 경찰은 2월 엔비디아 칩이 포함된 서버 3억9000만 달러어치를 판매한 혐의로 남성 3명을 체포했다. 검찰은 이 서버들이 처음에는 싱가포르 기업에 공급된 뒤 말레이시아로 재수출됐다고 주장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것이 최종 목적지였는지는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분명한 것은 미국의 수출 금지로 인한 높은 수요가 공식 유통망이 아닌 경로를 통해 칩을 거래하면 ‘금광’처럼 큰 이익을 볼 수 있는 경로가 만들어졌다”면서 “업계 한 임원은 금지된 엔비디아 칩은 현재 중개업자를 통해 30~50%의 프리미엄이 붙은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고 말했다”고 알렸다.
엔비디아 칩이 중국뿐 아니라 러시아로도 밀수되고 있을 가능성도 짚었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금지된 칩을 러시아로 재수출한 혐의로 인도의 몇몇 기업들에 제재를 가했다. 이 중에는 인도 뭄바이에 본사를 둔 제약회사 슈레야라이프사이언스가 포함돼 있다. 무역 데이터 제공업체 트레이드비전에 따르면 이 회사는 올해 러시아로 3억2200만 달러 상당의 기술 제품을 수출했는데, 그중 상당수가 엔비디아 칩이 포함된 델 서버였다.
무엇보다 엔비디아는 미국의 수출 규정을 준수한다고 주장하지만 연간 600만 개 이상의 AI 칩의 최종 사용자를 직접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엔비디아는 칩을 구글,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클라우드 대기업이나 델, 슈퍼마이크로와 같은 서버 제조업체에 공급하고, 또 이들이 다시 서버를 고객에게 판매하거나 임대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수출통제를 집행하는 상무부 산하 산업안보국(BIS)의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점도 엔비디아 칩의 수출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제공한다. 그루네발트는 BIS가 동남아와 오세아니아 전체를 담당하는 수출 통제 담당자가 한 명뿐이라고 지적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엔비디아는 모든 칩의 흐름을 추적할 수 없고, BIS는 모든 서버를 점검할 수 없다”면서 “밀수업자들은 여전히 허점을 찾아낼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미국이 AI 경쟁에서 중국을 앞서고 싶다면 더 강한 통제가 아니라 더 빠른 혁신이 필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