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칼럼] 국정화가 걱정이다

입력 2015-10-13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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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태종이 화살로 노루를 쏘다가 말이 쓰러지는 바람에 땅에 떨어졌다. 다치지는 않았지만 창피했던지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태종 4년(1404) 2월 8일의 실록에는 왕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까지 기록돼 있다.

성종 16년(1485), 시장 이전계획에 반대하는 상인들이 언문으로 투서를 해 영의정 윤필상 등을 비난했다. 관리들의 잇속을 챙기는 조치라는 주장이었다. 7월 21일 기록에 의하면 윤필상은 울면서 자신을 면직해 달라고 했으나 왕은 들어주지 않았다. 이 기록의 말미에 ‘그 얼굴빛을 보면 비록 우는 상 같으나 그 눈을 보면 눈물의 흔적이 없었다’고 씌어 있다.

무섭다. 역사를 기록하는 이들의 엄정함과 추상같은 기개가 실로 이와 같았다. 그런데 이런 원사료(原史料)를 이용해 새로운 교재를 만들 경우 자료의 취사와 해석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는 태종의 말은 왕의 멋쩍은 부탁으로 보이지만, 언로를 막는 행태이며 언론탄압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성종이 ‘투서를 한 무지한 저자 사람들’(실제로 이렇게 말했다)을 무시하고 비리 혐의가 있는 관리를 봐준 점을 부각시켜 왕과 관리들이 잇속을 함께 챙겼을 거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역사는 해석이며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역사는 이긴 자의 기록이거나 권력을 쥔 사람들의 필요와 이념에 의해 편집되고 재해석되는 통치도구이며 수단이라는 점이다.

1990년대에 시작된 국사교과서 이념 쟁투가 12일 교육부의 ‘역사교과서 발행체제 개선방안’ 발표로 더 가열되고 있다. 역사교과서의 국정화가 핵심인 이 발표에 따라 중학교 ‘역사’와 고등학교 ‘한국사’는 1년 안에 새 교과서를 만들어 2017년 신학기 전인 2월까지 공급해야 한다.

‘교과서 전쟁’의 초점이 국정화인 데다 정부·여당이 전면에 나선 점,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이 문제를 표 결집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점에서 쟁투양상은 치열하고 심각하다. 역사교과서 발행 체제를 검정에서 국정으로 전환하는 것은 1973년 이후 42년 만이니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 일을 그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 되살린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민주사회에서 국정교과서는 시대에 맞지 않으며, 역사 해석을 단일화하는 것은 전체주의 사회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견해에 동의한다. 국정교과서는 학생들은 물론 학계에도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거나 좌편향이 심한 교과서가 괜찮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문제점과 오류, 편향된 기술을 고쳐야 한다.

이번 조치로 가장 우려되는 것은 교과서의 보수편향과 졸속 제작이다. 교육부는 11월 말부터 1년 동안 집필을 마친다지만 충분한 기간이 아니다. 부실과 오류가 걱정된다. 하기는 1973년 국정으로 전환할 때 8개월 만에 집필과 발간을 마친 일도 있지만 지금이 그 시대는 아니잖은가. 교과서 집필 경험이 있는 사람은 필자 간의 의견 조정과 원고 작성, 윤문·교정 등의 과정을 거치려면 최소한 3년 이상은 걸린다고 말한다.

집필진 구성도 교육부의 희망대로 원활하게 될 것 같지 않다. 국정화에 대해 유신 회귀, 전체주의 국가화라는 비판이 나오는 상황에서 실력과 인망을 갖춘 학계 인사가 참여하려 할까. 교육부가 생각하고 있는 명단대로 집필진을 구성하기는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국정화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과서 전쟁이 벌어지게 하는 불씨가 될 것이다. 5년마다 홍역을 치를 게 뻔하다. 그런데 이미 ‘국정화’의 강을 넘었으니 지금 촉구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 내에 토목공사 마치듯 ‘교과서 개혁’을 이루려 하지 말라는 것, 장기적으로 독자적이고 공정한 교과서 집필기구를 만들어 항구적으로 운영하라는 것이다. 정부가 곧 나라는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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