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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떼의 경제학] "나 때는 사장님 차였는데"…이젠 '오빠차' 된 그랜저

입력 2020-02-17 16:19 수정 2020-02-19 11:08

'라떼의 경제학'은 과거에 유행했던 제품을 조망한 코너입니다. 경제적 규모는 물론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아 소개하겠습니다.

(사진제공=현대자동차)
(사진제공=현대자동차)

1993년, 철길에서 영상을 찍는 소년이 "우리 이다음에 성공하면 뭐할까?"라고 친구에게 묻는다. "그랜저 사야지"라고 대답하는 친구. 그는 '성공'을 그랜저에 이입했다. 1986년부터 생산하고 있는 현대자동차의 고급 준대형 세단에 성공의 상징이 된 것이다.

광고가 전파를 타는 횟수가 많아질 수록 괜찮다는 평가도, 속물 같다는 비판도 함께 받았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성공하는 사람은 그랜저를 탄다'는 인식은 90년대 초반에 자리 잡았다.

(사진제공=현대자동차)
(사진제공=현대자동차)

◇성공한 사장님이 타는 차 그랜저, 열풍의 시작

그랜저는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류층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장엄함, 위엄을 뜻하는 영어단어 'grandeur'에서 이름도 멋졌지만, 디자인과 기술도 한몫했다. 처음 출시된 그랜저는 직선이 많고 차량에 각이 많아 '각(角) 그랜저'라고 불렸다. 여기에 전자 제어 연료 분사 방식의 MPI 엔진 등 최첨단 기술을 장착했다.

경제발전을 거듭하던 1990년대 초반, 많은 사람이 성공을 '경제적 성취'로 치환했다. 그랜저의 가격은 '성공한 사람이 타는 차'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요인이도 했다. 당시 그랜저 가격은 1690만 원이었는데, 이는 같은 시기 아파트 한 채에 버금가는 금액이다. 국산 차 판매량이 약 40만 대였던 시절, 어마어마한 가격에도 출시 다음 연도에 4000여 대를 팔았다. 세대 교체 전까지 9만 2574대가 팔릴 만큼 그랜저는 큰 인기를 누렸다.

기술력이나 가격 등으로 인해 그랜저는 '사장님 차'라는 인식이 굳어졌다. 이 때문에 1992년 대선에 출마한 현대 창업주 고(故) 정주영 회장은 유세장에서 서민 대통령 후보 이미지를 풍길 수 없단 이유로 자신의 승용차를 그랜저에서 소나타로 바꾸기도 했다.

▲'GRANDEUR'이란 대신 'AZERA'라는 단어가 붙었다. 그랜저의 수출명이다. (출처=인터넷 커뮤니티 캡처)
▲'GRANDEUR'이란 대신 'AZERA'라는 단어가 붙었다. 그랜저의 수출명이다. (출처=인터넷 커뮤니티 캡처)

◇그랜저? 아제라?…봉준호 감독보다 먼저 아카데미 장식

영화 기생충으로 봉준호 감독이 상을 휩쓸면서 아카데미는 국내에서도 친숙한 시상식이 됐다. 그는 각본상을 받고 "이건 한국의 첫 오스카다"라고 말하면서 국내 팬들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랜저는 봉준호 감독보다 먼저 아카데미에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상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현대차는 2009년 처음 아카데미 후원사로 참여했는데, 2012년 그랜저를 전면에 내세워 광고를 제작해 홍보했다. 단, 이름은 그랜저가 아닌 '아제라'다. 미국의 전형적인 가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상황과 아제라의 첨단 기능을 활용하는 내용을 주제로 했다. 그다음 해에도 성우의 목소리 연기로 시상식에서의 수상 소감과 같은 화법으로 아제라를 소개했다.

(사진제공=현대자동차)
(사진제공=현대자동차)

◇젊은 차로 변신한 그랜저…"더는 사장님 차 아니죠. 이젠 오빠 차!"

세월이 흐르면서 그랜저는 '성공한 사장님 차'가 아닌 중산층이 타는 차, 오빠들이 타는 차로 변모했다. 기존에는 50대 고객이 가장 많았으나 더는 아니다. 젊은 사람들의 수요가 늘고 있다. 30대는 물론 40대는 자신의 상황에 맞게 그랜저를 구매해 타고 있다.

새 차를 구매하기 부담스러운 30대 사회초년생이 그랜저를 중고차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SK엔카닷컴 사용자 데이터를 분석 결과, 30대가 가장 많이 조회한 차는 '그랜저 HG'이다. 30대 남성은 그랜저 HG(37만여 건), BMW5 시리즈(35만6000여 건), 메르세데스-벤츠 E클래스(34만3000여 건) 순으로 나타났다.

신차로 선택하는 비율도 높아지고 있다. 더 뉴 그랜저는 사전계약 첫날(11월 4일) 1만 7294대, 누적 사전계약 3만 2179대(영업일 11일 기준)를 기록했다. 이는 기존 그랜저의 사전계약 대수(영업일 14일 기준, 2만7491대)를 넘어선 기록이다. 특히, 30대 계약자가 이전 모델에(18%) 비해 약 3% 높은 21.2%로 집계됐다.

젊은 층이 그랜저에 눈을 돌린 것은 디자인 세련된 디자인과 기능 때문이다. 중후한 느낌인 검은색 대신 하얀색과 회색, 은색 등으로 외관을 칠했고, 현대적이면서 간단한 디자인과 소재로 고급스럽게 꾸민 것이 통했다. 이러한 변화 덕분에 '영포티(Young Fortyㆍ나이보다 젊게 살려고 하는 40대)'들의 그랜저 구매율이 늘어 주 고객층으로 자리 잡았다.

(출처=현대자동차 유튜브 캡처)
(출처=현대자동차 유튜브 캡처)

◇그랜저, 시대에 따라 변했는데…광고는 그대로

그랜저는 변했지만, 광고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면서 성공의 가치가 달라졌는데도 그랜저 광고는 10년 전과 같다. 여전히 '성공=그랜저'라는 프레임을 사용하고 있는 것.

2009년, 그랜저 광고는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말에 그랜저로 대답했습니다"라는 문구를 내세웠다. 자동차가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닌 사회적 위치를 보여준다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반응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2019년 그랜저IG 페이스리프트 모델의 광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칭찬한 사람도 있지만, 부적절하다는 의견 역시 적지 않았다. 이 가운데, 부적절하다는 의견에는 성공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지적을 담고 있다. 사회가 성숙한 만큼, 성공의 기준에 대해 다양성을 담을만도 한데, 아직도 80~90년대 물질만능주의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이 때문에 "기존 사회가 추구하는 성공상을 그대로 따라간다"라는 반응이 나왔다. 상품으로서의 그랜저는 호평을 받았지만, 광고는 아직도 '호불호'가 갈리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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