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키워드] 골든타임(Golden Time)-정유년(丁酉年)에는 없어져야 할 단어

입력 2016-12-29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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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올해 마지막 키워드로 ‘골든타임’을 골랐습니다. 진작부터 이 단어에 심드렁했는지라 한 번은 이걸 놓고 글을 쓸 생각이었으나, 타이밍을 잡지 못하다가 연말 칼럼으로 이게 제격이다 싶었습니다.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면, 정유년 새해에는 이 말을 안 들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왜냐? 너무나 자주 쓰인 탓에 값어치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지난 몇 해 동안 뉴스에 너무나 자주 등장했습니다. 포털에서 검색해 보십시오. ‘골든타임’이 들어간 뉴스 9만3000여 건이 순식간에 뜹니다. 이게 무슨 금이겠습니까? 금은 귀해서 금인데!

원래 이 단어는 방송과 관련해서 쓰였습니다. 한국과 일본 방송인들이 시청률이 가장 높은 시간대, 광고료를 금값처럼 비싸게 받을 수 있는 시간대를 ‘골든타임’이라고 했지요. 실제 9만3000건의 뉴스 중 초기 것에는 이 단어가 이런 의미로만 쓰였습니다. (미국 방송가에서는 프라임 타임-Prime Time-이라고 쓴답니다.)

이 단어가 ‘무엇을 하기 위해 가장 귀중한 시간’이라는 의미로 본격 사용된 건 지금 대통령이 연설이나 인사말에 동원하면서부터인 듯합니다. 대통령은 2013년 4월 17일 새누리당 소속 국회 정무·기획재정위원 오찬에서 “의학계에서는 응급치료를 놓쳐서는 안 되는 ‘골든타임’이 굉장히 중요한데, 추경 예산안이나 부동산 대책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습니다.

대통령이 이 단어를 공식 석상에서 사용한 건 그 얼마 전 방영돼 인기를 끈 TV드라마 ‘골든타임’ 때문일 겁니다. 드라마 주인공인 외과 의사들은 ‘심장 마비, 호흡 정지, 대량 출혈 등이 일어난 후에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절대적 시간’이란 뜻으로 이 단어를 자주 사용했습니다.(이 줄을 쓰는 순간 기자적 모진 충동이 튀어나옵니다. ‘혹시 최순실 씨가 대통령 인사말을 첨삭하면서 이 단어를 밀어 넣었나?’라고 의심해 본다는 말입니다.) 대통령의 이 인사말 이후 장관, 지자체장, 공공기관장들도 이 단어를 이런 의미로 사용합니다. 기사와 칼럼에도 등장합니다.

대통령이 처음 이 말을 한 날부터 1년에서 꼭 하루가 모자라는 이듬해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면서 ‘골든타임’이 봇물 터진 듯 사용됩니다. 처음엔 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던 시간을 허비한 것을 두고 “구출의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식으로 절망을 담아 말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세월호 사건으로 대한민국호가 바로 항해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맞았다”며 희망에 찬, 미래지향적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4월 16일 오후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해 세월호 침몰사고 상황 보고를 받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4월 16일 오후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해 세월호 침몰사고 상황 보고를 받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조사하면서 드러난 정치·경제·사회 구석구석을 모조리 썩게 만든 부패와 부정의 고리를 끊고,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온 모든 비리를 없애며, 지연·혈연·학연으로 연결된 인적 관계가 아니라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니 이게 어찌 골든타임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었지요.

대통령도 약 4개월 뒤 무슨 회의에서 “(규제를 혁파하지 못하면) 10년, 20년 후엔 우리 대한민국은 설 땅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시기에, 골든타임이라고 하는데, 반드시 모두가 국민도 같이 공감을 해서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내야만 우리의 미래가 있고 또 우리 후손들에게도 떳떳한 세대가 될 수 있다는 이런 각오로 정말 우리나라가 나아갔으면 한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발언이 깔끔하진 않지만 대통령도 이 단어 사용의 새 흐름에 편승한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희망을 담은 골든타임은 번번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어쩌면 한 번도 우리 옆에 오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요즘 들어 이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 게 그 증거입니다. “최순실 사건으로 이제 정말 대한민국이 바로 서게 될 기회를 맞았다. 우리는 진정한 골든타임을 맞았다”라는 말과 글이 얼마나 많이 돌아다닙니까.

하지만 이런 말, ‘대통령과 최순실 덕분에 대한민국이 진정으로 바로 설 기회가 왔다’는 말을 듣노라면 씁쓸하고 허탈하기만 합니다. 그 많은 골든타임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해 지금 이 지경이 됐는데 또 “골든타임이 왔다, 우리 모두 잘해 보자”는 말이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유년 새해에는 골든타임이라는 말이 없이, 그저 평안히, 평안히 살아가는 날들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 글을 썼습니다.

하나 덧붙일 게 있네요. 영어 사용 국가에서는 ‘골든타임’을 과거의 좋은 때를 말할 때 쓰지, 우리처럼 미래에 대비하기 좋은 시간이라는 뜻으로는 사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필리핀의 독재자였던 마르코스의 부인 이멜다의 말이 좋은 예문이 되겠습니다. “The Marcos era was the golden time for the Philippines.” “우리 남편 그 시절, 그때가 내 골든타임이었지”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지요. 미래의 귀중한 시간은 ‘골든아워’라고 표현한답니다. 어긋난 용어 사용도 우리의 골든아워를 망친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하면 지나친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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