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영 신화…대우그룹 창업주 김우중 누구?

입력 2019-12-10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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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대우실업으로 출발, 인수합병 반복하며 30여 년 만에 재계 2위 수성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별세했다. 향년 83세.

만 30세 때인 1967년 대우실업을 창업한 김우중 전 회장은 30여 년 만에 재계 2위 대우그룹을 일궈내며 재계의 입지전적인 인물로 통했다.

섬유 수출업체에 근무하던 '청년 김우중'이 원단생산업체인 대도섬유의 도재환 씨와 손잡고 세운 회사가 대우실업이다. 대우실업 역시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대우그룹 김우중 전 회장이 지난 2017년 열린 대우그룹 창업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기념사를 하고 있다.  (뉴시스)
▲대우그룹 김우중 전 회장이 지난 2017년 열린 대우그룹 창업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기념사를 하고 있다. (뉴시스)

자본금 500만 원에서 시작한 대우실업은 수출로 회사를 키우기 시작했다.

창업 첫해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을 싱가포르에 수출, 58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린 게 시작이었다. 이어 인도네시아와 북미 등으로 시장을 넓혀 큰 성공을 거뒀다.

창업 이듬해인 1968년에는 수출 성과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때부터 대우실업은 빠른 성장을 거듭했다. 1969년 한국 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해외(호주)에 지사를 세워 대우실업의 이름을 남겼다.

1973년에는 토목과 건설에도 진출했다. 이때 영진토건을 인수,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1974년에 소형 가전사를 인수해 대우전자의 시초를 만들기도 했다.

본격적인 대우그룹의 성장은 1975년 시작한 종합상사였다. 당시 해외 판로를 확보해온 대우그룹은 국내 중소기업들의 수출 창구로 급부상하기도 했다. 이 역시 김 전 회장이 주도했다.

중소기업의 수출 창구로 급성장한 대우실업과 대우개발이 합쳐지면서 본격적인 ㈜대우를 출범시켰다.

김 전 회장은 경영위기에 빠졌거나, 인수합병 시장에 나온 기업을 점진적으로 거머쥐면서 대우그룹을 키웠다.

㈜대우 출범 이듬해인 1976년에는 옥포조선소를 인수, 대우중공업으로 만들었다.

1983년 대한전선의 가전사업부도 거머쥐었다. 앞서 인수한 대우전자에 이를 포함하며 대우그룹의 주력 사업부로 성장시켰다. 삼성과 럭키금성(LG의 전신)이 주도하기 시작한 가전 사업에 뛰어들며 탄탄한 품질을 앞세우기도 했다. 이때 등장한 슬로건이 고장이 나지 않고 내구성이 뛰어나다는 의미를 담은 ‘탱크주의’였다.

재계에서 처음으로 해외 지사를 세웠던 김 전 회장의 세계 경영은 1970년대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남미 에콰도르(1976년)에 이어 수단(1977년)과 리비아(1978년) 등 생경했던 아프리카 시장 진출을 추진하며 해외사업의 터를 닦았다.

1970년대 연이은 인수합병과 해외 시장 진출 덕에 1967년 대우실업을 세운 지 15년 만에 대우그룹은 자산 규모 재계 4위의 그룹사로 성장했다.

해외영업에서 남다른 수완을 발휘한 김 전 회장은 '박정희 정권'에서 가장 두드러진 기업인으로 주목받았다. 박 전 대통령이 김 전 회장의 부친이 대구사범 은사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절친한 사이가 된 것으로 재계에서는 전해진다.

김 전 회장의 세계경영은 이후에도 지속했다.

특히 1990년대 동유럽 진출이 대표적이다. 독일 통일 이후 동유럽의 몰락이 시작하자 폴란드와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자동차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하며 세계경영을 본격화했다.

1998년 기준 해외 현지법인이 390여 개에 달했다. 지사와 사무소를 포함한 해외 네트워크가 모두 589곳이나 됐다, 해외에서 직접 고용한 인력만 15만2000여 명이었다.

김 전 회장은 1년 365일 가운데 해외 체류 기간이 9개월에 달했다. 그의 세계경영의 일화 가운데 하나다.

▲김 전 회장은 외환위기 이후, 재계 재입성 대신 옛 대우그룹 기념행사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운신의 폭을 제한했다. 김 전 회장이 2009년 그룹 창립 42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모습.  (뉴시스)
▲김 전 회장은 외환위기 이후, 재계 재입성 대신 옛 대우그룹 기념행사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운신의 폭을 제한했다. 김 전 회장이 2009년 그룹 창립 42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모습. (뉴시스)

승승장구하던 대우그룹은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급격히 몰락했다.

박정희 정부를 시작으로 5공화국까지 승승장구했던 대우그룹은 김대중 정부 경제관료들과 갈등이 커지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1998년 3월 전경련 회장을 맡은 김 전 회장은 ‘수출론’을 강조했으나 관료들과 갈등은 여전했고 오히려 개혁의 대상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맞았다.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그룹 구조조정의 열쇠였던 대우차-미국 GM 합작 추진이 흔들렸다.

자금 확보에 실패한 김 전 회장은 어음으로 돌파구를 찾으려 했으나 금융당국의 기업어음 발행 한도 제한 조치에 가로막혔다. 정부 역시 부실기업이 돈을 빌려 살아남는 현상을 막기 위해 제도를 바꿨다.

나아가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져 대우그룹은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결국, 김우중 전 회장은 1999년 말까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구조조정 방안을 내놨다.

반면 1999년 8월 기준, 전체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그룹은 끝내 해체됐다.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2006년 징역 8년 6월과 벌금 1000만 원, 추징금 17조9253억 원을 선고받았다.

선고와 함께 복역을 해오다 2008년 1월 특별사면됐다.

말년에 '제2의 고향' 베트남 등을 오가며 글로벌 청년사업가 양성 프로그램에 주력하며 명예회복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17조 원에 이르는 미납 추징금과 세금을 내지 못하고 1년여 투병 생활을 하다 생을 마감했다.

김 전 회장은 자신이 개인 재산을 내 세운 아주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지난 1년여 동안 입원을 거듭한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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