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의 말] 발견된 청와대 문건, 정치적 ‘예의’를 먼저 생각했어야

입력 2017-07-25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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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청와대 정책실장

상식으로 이야기해 보자. 길을 가다가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의 가방을 발견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열어 본 뒤 뭐가 들어 있다고 동네방네 떠드는 게 먼저일까? 아니면 일단 그 친구에게 알려주거나 전해주는 것이 먼저일까?

당연히 후자, 즉 주인에게 알려주거나 전해주는 게 먼저일 것이다. 어쩌다 열어 보았고, 그 속에서 불미스러운 물건이 들어 있는 걸 보았더라도 그렇다. 알아야 할 사람이나 기관에 알리면 그만이지 동네방네 떠들 일은 아니다.

청와대가 민정수석실, 국가안보실 등에서 앞 정부의 문건을 무더기로 발견하고서 그 내용의 일부를 공개한 것을 두고 하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세상이 떠들썩하게 처리하는 것이 맞을까? 솔직히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법적으로야 문제가 없어 보인다. 야당에서는 기밀 누설이다 뭐다 하지만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청와대의 설명처럼 아직 기밀로 분류되지도 않았고, 대통령기록물로서의 지위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모든 일의 원인이 앞 정부의 부실한 처리에 있다. 지금의 청와대를 두고 법적 책임 운운할 상황이 아니다.

하지만 정치와 행정에도 예의라는 게 있다. 가방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그 주인에게 알려주거나 돌려주듯 이 건 역시 청와대의 마지막 비서실장 등 관련 인사들과 상의하는 것이 옳았다. 대통령기록관으로 넘기기 전의 등급 분류는 누가 어떻게 할 것인지, 어쩔 수 없이 보게 된 문제 되는 내용의 법적 처리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말이다.

‘예의’를 지켜야 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의 정신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법의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가 임기 중에 한 결정이나 행위 일부를 정치적 상대나 일반 국민이 일정 기간 보지 못하게 하는 데 있다. 여기서 자세히 이야기할 사안은 아니지만 당연히 그만한 이유가 있어 그렇게 하는 것이다.

법의 목적과 정신이 그렇다면 상대의 문건을 발견한 청와대는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옳았을까? 법률적 의무는 없지만 상대에게 먼저 통보하고, 그들과 상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예의’ 아니었을까?

흔히들 “법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을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옳은 말이다. 법이 방어와 보호를 제공하고 있는데도, 문건을 무더기로 남겨두는 무책임과 무능을 보였으니 뭐라 이야기해야 하겠나. 하지만 집권을 한 쪽이 허겁지겁 청와대를 떠나야 했던 상대에게 꼭 이래야 했을까? 좀 더 여유 있는 모습은 보여줄 수 없었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예의를 지켜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앞으로의 청와대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예의를 지키는 선례를 남겨놓지 않으면, 이런 문제로 말미암은 불필요한 정치적 공방이 계속될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청와대의 문건은 여러 경로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 주변의 인사들은 자신들의 기록이 세상에 알려지게 될 때를 대비한다. 이를테면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대통령의 지시를 단순한 의견인 양 표시해 두기도 하고, 반대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대통령의 의견을 지시로 포장해 두기도 한다. 아니면 아예 폐기해 버리기도 한다.

일종의 보호 욕구라 할 수 있는데 문건이나 메모를 둘러싼 정치적 공방이 치열해질수록 이러한 욕구는 더 강해진다. 진실을 왜곡하거나 폐기해 버린다는 말이다. 이 경우 역사는 그만큼 더 왜곡될 수밖에 없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상대의 과오와 무능을 비웃기만 할 일도, 국정농단 관련 증거를 발견했다고 좋아할 일도 아니다. 국가의 기록에 관한 문제이고 역사에 관한 문제이다. 지금이라도 예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또 그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정치권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문제에 관한 과도한 정치적 공방을 삼가야 한다. 달리 말하는 게 아니다. 국가의 기록을 지키고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어떤 경우에도 이제 겨우 자리 잡아가는 기록 문화를 해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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