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터리 팩은 성능 저하와 화재 위험, 중고차 잔존가치 하락의 주원인으로 꼽히는 ‘소모품’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지만 폐차 때 평가가 극명하게 달라진다. 희유원소에 기인한 잔존가치가 가장 높아 부품 중 배터리 팩이 가장 비싸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업계가 직시하기 시작했다. 특히 팩 반납 의무가 사라지며 폐배터리 팩을 둘러싼 ‘소리 없는’ 쟁탈전이 이미 발발했다.
이번 실증 사업의 핵심은, 잔존가치가 큰 배터리 팩의 특성을 고려해 그 총 소유 비용을 개인 소비자가 아닌 금융·서비스 체계가 분담하자는 데 있다. 넓게 보면, 자동차 산업이 기존보다 한 단계 더 진화한 운영·금융·에너지 서비스 산업으로 이행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번 실증 사업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배터리 팩을 독립 자산으로 관리하는 체계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는 배터리 팩의 전 주기 이력 관리를 제도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자동차에 차대번호가 있듯, 배터리 팩에도 고유 식별번호를 부여하여 할 수 있다. 그래야 제조·교체·운영·에너지저장장치(ESS) 재사용·재제조·유통·재활용에 이르는 전 주기를 추적할 수 있다.
배터리 팩에 고유 번호가 부여되면, 축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잔존가치를 평가하는 생태계도 구축할 수 있어 배터리 팩은 ‘독립 자산’으로 지위가 격상될 수 있다. 나아가 담보 설정과 자산유동화가 가능한 금융자산으로도 대우받을 수 있다.
배터리 구독 개념 그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필자는 2011년 저서 ‘그린카 콘서트’에서 전기차 보급의 최대 걸림돌로 배터리 가격을 지목하며, 차량과 배터리의 소유권을 분리하는 ‘배터리 팩 리스’ 모델이 ‘총소유비용’ 측면에서 가장 유력하다고 처음 제안한 바 있다. 당시에는 제도·산업·기술의 미성숙으로 실현되지 못했으나, 15년이 지난 지금, 산업 현장에서 그 아이디어가 다시 움트기 시작했다. 배터리 팩 고유 번호 체계도 필자가 2022년 대통령직인수위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며 배터리 팩 고유 식별 체계의 필요성을 최초로 제기한 바 있으나, 안타깝게도 실행계획까지 발전하지 못했다.
2022년에도 늦었다고 생각하고 드라이브 걸었던 구상이 정권이 바뀌어서야 실증 사업으로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을 늦었다고 후회해 본들 무의미하다. 개념은 우리나라에서 먼저 만들어졌지만, 중국이 이미 구현해버렸다. 이는 다양한 배터리 팩을 원활하게 수급할 수 있는 산업 생태계가 중국에 먼저 구축된 덕도 크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자동차 산업도 앞으로 좋은 차를 만드는 데 머물기보다 금융 자산화된 배터리 팩 리스가 경쟁의 축으로 부상할 수 있다. 미래 전기차 시장의 패권은 가장 많은 배터리를 수급하고, 그 가치를 정확히 평가하는 생태계를 구축한 기업에 돌아갈 것이다. 자동차 금융이 자동차 산업의 성장을 이끌었듯, 배터리 금융이 우리나라 전기차 산업의 새로운 성장 엔진이 되길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