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개표된 2000표.
서울시장 선거를 비롯한 전국 주요 선거 결과가 사실상 확정된 뒤에도 서울 송파구 잠실7동 제2투표소의 투표함은 개표소로 가지 못했습니다. 6·3 지방선거 본투표일 투표용지 부족으로 투표 시간이 오후 10시까지 연장됐던 이곳에서는 이튿날인 4일 정오가 지나도록 투표함 2개가 투표소 안에 남아 있는데요. 약 2000명의 투표분이 개표되지 못한 채 묶였고, 투표소 밖에서는 보수 성향 유튜버와 시민 등 수백 명이 “개표 중단”, “선거 무효”, “선관위 해체”를 외치며 투표함 반출을 막았습니다.
사태의 출발점은 전날 벌어진 투표지 부족이었는데요. 헌정사상 역대 초유의 사태였죠. 잠실7동 제2투표소에서는 투표 마감 시각을 앞두고 투표용지가 동이 났습니다. 유권자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선거인명부 대조전표를 받은 유권자에 한해 투표 마감 시각을 오후 6시에서 오후 10시로 연장해 투표를 진행했는데요. 서울시 선관위는 전날 오후 11시 50분께 투표 종료를 공식 확인했지만, 이후 투표함 2개를 개표장으로 보내지 못했죠.
투표지가 모자란 현장은 잠실7동만이 아니었습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공식적으로 확인한 투표용지 부족 투표소는 서울 송파구 12곳, 강남구 1곳, 광진구 1곳 등 모두 14곳이었는데요. 인천 연수구 일대 투표소에서도 투표용지가 부족해 일부 유권자가 대기하는 소동이 있었고요. 송도5동 제1투표소에서는 투표용지가 부족할 것 같다는 현장 연락 뒤 추가 투표용지가 도착했지만, 이 과정에서 유권자들이 약 10분가량 대기하며 항의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선관위는 지방선거 투표율이 지난 선거보다 높아 일부 투표소에서 준비된 투표용지가 부족했다고 해명에 나섰는데요. 허철훈 중앙선관위 사무총장은 3일 밤 대국민 사과와 현장 브리핑을 진행했죠.
투표지 부족은 단순한 현장 혼잡이 아니었습니다. 투표소에 온 유권자에게 건넬 투표지가 없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장면이었는데요. 대기 지연으로 시작된 문제는 곧 선거관리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 번졌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논란이 된 것은 투표용지 부족만이 아니었는데요. 서울 영등포구 당산제2동 제1투표소에서는 한 남성이 투표용지 중복 수령 가능성을 문제 삼으며 항의한 사례가 나왔죠. SBS에 따르면 이 남성이 선관위의 허술한 관리 체계로 투표용지를 두 번 받는 것이 가능한지 확인하려 했고 실제 중복 수령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자 현장에서 문제를 제기했는데요.
이미 투표한 사람이 다시 투표용지 교부 단계에 접근할 수 있다는 의심이 현실화될 뻔한 사건인데요. 앞선 투표지 사태와 함께 선거관리의 핵심 절차에 대한 불안함을 더했죠.

투표소 소란, 투표지 촬영, 투표지 훼손, 선거사무원 폭행, 신분 확인 착오 같은 선거 사건·사고는 사실 매번 반복됐는데요. 다만 이런 사건들은 대체로 개별 유권자의 일탈이거나 현장 질서 관리의 문제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선관위의 부실 관리 논란은 반복적으로 불거졌는데요. 대표적인 사례가 2022년 제20대 대통령선거 사전투표 당시의 이른바 ‘소쿠리 투표’ 논란입니다. 코로나19 확진자·격리자 사전투표 과정에서 일부 유권자가 기표한 투표지를 직접 투표함에 넣지 못하고 선거사무원이 바구니나 종이상자, 쇼핑백 등에 받아 옮긴 일이 문제가 됐는데요. 당시 비밀투표와 직접투표 원칙이 훼손됐다는 비판이 거세졌고 중앙선관위원장이 사과하고 사무총장이 물러나는 상황으로 이어졌죠.
2025년 제21대 대통령선거 사전투표 첫날에는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주민센터 사전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외부로 반출되는 일이 발생했는데요. 관외 선거를 위해 대기하던 일부 선거인이 대기 줄이 길다는 이유로 투표용지와 회송용 봉투를 받은 채 투표소 밖으로 나갔다는 보도가 나왔죠. 또다시 선관위의 부실관리 논란이 다시 불거졌습니다.
더 멀리 가면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의 구로구을 우편투표함 사건도 있는데요. 당시 우편투표함 반출을 둘러싸고 부정선거 의혹과 시민 항의 농성이 벌어졌고 사건은 오랫동안 한국 선거사의 대표적인 논란으로 남았죠. 훗날 검증에서는 해당 우편투표함의 조작이나 위조 정황은 확인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선관위는 당시 투표함 관리 절차가 충분히 엄격하지 못했고 그 부실한 관리가 논란의 발단이 된 데 대해서는 유감을 밝혔는데요.
이처럼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선관위는 대국민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초유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까지 벌어지며 그 ‘방지’와 ‘대책’에 대해 불신만 쌓였죠.

투표용지 부족이 한국에서만 벌어진 일은 아닙니다. 해외에서도 투표용지나 투표용지용 종이 부족, 잘못된 투표용지 배부, 현장 물류 차질로 선거가 흔들린 사례가 있죠. 가장 자주 거론되는 사례는 2021년 독일 베를린 선거인데요. 당시 베를린에서는 독일 연방하원 선거, 베를린 주의회 선거, 구의회 선거, 주민투표가 같은 날 치러졌고, 여기에 베를린 마라톤까지 겹치며 혼잡한 상황이었습니다.
일부 투표소에서는 투표용지가 떨어졌고 다른 선거구의 투표용지가 배부되는 일도 발생했죠. 긴 대기줄이 생겼고 일부 유권자는 공식 투표 종료 시각인 오후 6시 이후에도 투표를 진행됐는데요. 출구조사 결과가 공개된 뒤에도 투표가 이어지는 문제까지 겹치면서 이번 지선 사태와 비슷한 논란이 일었죠.
후폭풍은 컸습니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2023년 12월, 2021년 연방하원 선거를 베를린 내 2256개 투표구 중 455곳에서 다시 치르라고 결정했는데요. 이듬해 2월 부분 재투표가 시행됐고 자유민주당은 연방의회 의석 1석을 잃었죠. 선거 결과 전체를 뒤집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절차상 하자가 재투표를 명령할 만큼 중대하다고 판단했다는 AP 보도도 나왔습니다.
다만 베를린 사례는 투표용지 부족 하나만으로 재선거가 이뤄진 사건이라기보다 투표용지 부족, 잘못된 투표용지 배부, 장시간 대기, 투표 종료 이후 투표, 마라톤에 따른 물류 차질이 겹친 복합적 선거관리 실패였는데요. 이번 투표지 부족사태와 바로 동일선상에 놓는 것은 다소 어렵죠. 선관위 또한 재선거 요구에는 선을 그었는데요. 투표용지 부족은 공직선거법상 선거 연기나 재선거 사유가 아니라고 못 박았죠.
미국에서도 비슷한 유형의 선거관리 문제가 있었습니다. 2022년 펜실베이니아주 루저른 카운티에서는 투표용지용 종이 부족으로 일부 투표소 운영이 중단됐고 법원이 투표 시간을 2시간 연장했죠. 이후 카운티는 소송을 제기한 유권자들과 합의하며 향후 충분한 투표용지용 종이를 주문하고 선거 종사자 교육을 강화하기로 했습니다.

선관위는 그동안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정면으로 반박해왔는데요. 개표 결과 조작은 시스템상 불가능하고 사전투표함은 CCTV로 보관 상황을 공개하며 투표함 바꿔치기나 위조 투표지 투입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죠. 선거를 앞두고는 참관과 감시 장치를 강화하고 투표 절차를 설명하며 불신을 차단하려 했는데요.
선관위 스스로 가장 경계해온 불신의 빌미를 제공한 꼴입니다. 기본 절차가 흔들리는 장면에 또다시 의심이 고개를 들었는데요. 이번 투표지 부족 사태가 더 뼈아픈 이유도 여기에 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