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임기제·자사주 안건에 제동…주주권 기준 강화
고려아연 분쟁서 견제 선택…캐스팅보트 부각
국민연금이 정기 주주총회 시즌을 맞아 의결권 행사를 대폭 강화하는 분위기다. 상법 개정 취지에 어긋나는 안건에는 원칙적으로 반대하고, 일부 행동주의 펀드의 주주제안에는 힘을 실어주면서 주총 표 대결의 핵심 변수로 떠올랐다.
25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올해 주총에서 이사 선임, 정관 변경, 자사주 정책, 임원 보수 등 주요 안건 전반에 걸쳐 선별적인 의결권 행사를 이어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DB손해보험 주총이다. 국민연금은 20일 주총에서 행동주의 펀드 얼라인파트너스가 추천한 감사위원 후보에 찬성표를 던지며 이사회 진입을 지원했다. 시가총액 10조원이 넘는 상장사에서 행동주의 펀드가 제안한 후보가 선임된 것은 이례적이다. 당시 국민연금의 의결권 지분율은 8.38%로 주요 주주 중 하나였던 만큼 표 대결 구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기업가치 훼손 우려가 있는 이사 선임과 이사회 구조에도 엄격한 잣대를 적용했다. 국민연금은 전날 열린 미래에셋증권 김미섭 대표와 대신증권 양홍석 부회장의 사내이사 선임 안건에 대해 각각 ‘주주 권익 침해 이력’과 ‘내부통제 미흡’을 이유로 반대 의견을 밝혔다. 앞서 효성 조현준 사내이사 선임안을 비롯해 삼성물산 이정식·풍산 유시춘·LG에너지솔루션 이명규 사외이사 선임안에도 반대표를 던졌다.
경영권 분쟁 사안에서도 주주권 제고 원칙을 유지했다. 국민연금은 고려아연 주총에서 최윤범 회장 사내이사 재선임 등 일부 핵심 안건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거나 반대하며 견제 역할을 택했다. 국민연금이 보유한 지분이 5.20% 수준인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캐스팅보트로 작용할 수 있는 위치였다.
반면 상법 개정 취지를 훼손할 수 있는 안건에는 제동을 걸고 있다. 삼성전자와 삼성SDS의 이사 임기 유연화(시차임기제) 도입 시도에 반대표를 던진 것이 대표적이다. 집중투표제 효과를 약화시켜 소액주주의 이사 선임 권한을 제한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 외에도 이사 정원 축소, 전자주총 배제, 자사주 처분 방식 변경 등 주주 권한을 축소할 가능성이 있는 안건에도 반대 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다.
자사주 정책과 보수 체계에 대한 감시도 강화됐다. 자사주 취득 목적과 실제 활용이 불일치하거나 과도한 이사 보수 한도 상향이 제시된 경우에는 반대표를 행사하는 등 기업 자본정책과 보상 구조 전반을 점검하고 있다. 기아·현대해상의 임직원 보상 목적 자사주 처분, 삼성바이오로직스·삼성화재·삼성증권·롯데케미컬·농심·한미반도체·풍산의 이사 보수 승인안에도 줄줄이 반대표를 행사했다.
이 같은 변화는 스튜어드십 코드 내실화 기조와 맞물린다. 국민연금은 주총 시즌을 앞두고 “개정 상법 취지를 무력화하는 정관 변경 시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히며 의결권 행사 기준을 강화한 바 있다. 기관투자자의 수탁자 책임 이행을 실질적으로 점검하겠다는 정책 방향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과거보다 명확한 기준을 갖고 의결권을 행사하면서 행동주의 펀드와의 접점도 늘어나고 있다”며 “주총 결과뿐 아니라 기업들이 사전에 정책을 조정하도록 유도하는 영향력이 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