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전엔 혼자 사는 이모가 발목을 다쳐 3주째 꼼짝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왔다. 이모는 집에서도 휠체어를 탈 정도로 상태가 나빴다. 3주간 혼자 어떻게 살았냐며 호들갑을 떨자 이모는 OTT를 몰아보고 책도 실컷 읽었다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동네 친구들이 매일 간식을 들고 찾아와 놀다가, 간단한 반찬이나 청소를 해주고 갔다는 것이다. 걱정한 게 민망할 정도로 이모는 친구들과 북적이는 겨울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돌봄을 숫자와 시스템으로 설명하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국내 간병비 지출은 2018년 8조원, 작년엔 10조원이 넘은 것으로 국회입법조사처는 추산했다. 노인에게는 등급이 매겨져, 1등급이 요양원에 가면 하루에 9만3070원을 준다. 고령화 지자체들은 앞다퉈 돌봄 인공지능(AI)을 개발해 독거노인의 집에 안부 전화를 걸고, 로봇 인형을 들여놨다. 닥쳐오는 ‘돌봄 쇼크’를 돈과 기술로 막아내겠다는 노력이다. 돌볼 인구가 급증하고 있지만, 돌봄의 의미는 더 아리송해졌다.
‘골절이 치유된 흔적’은 인류학계에서 문명의 시작점으로 꼽힌다. 다친 이웃에게 연민을 느껴 먹이고 입힌 행동이 야만과 문명을 갈랐다. 돌봄이 얼마나 비싼지, 기술로 효율화할 수 있는지는 분명 현실적으로 필요한 논의다. 하지만 몇 푼의 지원금과 전화기 너머 AI 기계음도 돌봄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를 진정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빠지면 돌봄은 성립하지 않는다.
지난해 한 학술행사에서 접한 AI돌봄 로봇 연구가 잊히지 않는다. 결과는 대체로 긍정적이었지만, 한 노인은 “내가 로봇과 얘기하려고 태어났나, 내가 이렇게 살았나”라며 비관했다. 그 노인이 이번 설 연휴는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보냈기를 바란다. 돈과 기술도 좋지만, 혼자 남겨지는 사람이 없도록 사회 관계망을 보수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