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종별 비용 충격 현실화…“내년 계획 세우기 더 어려워”
철강·정유·반도체까지 ‘달러 청구서’…中企 헷지 수단 부족 충격 더 커

고환율이 제조업 전반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원·달러 환율이 1470원대까지 치솟으며 철강·화학·정유·자동차·반도체·기계·로봇 등 주력 산업은 물론 중소 제조업까지 ‘달러 청구서’가 일제히 불어나는 국면이다. 환율상승은 수출가격 경쟁력 개선 효과도 있지만 업계에서는 “가격 전가가 사실상 어렵다”며 누적 비용에 대한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24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3분기 국내 기업의 외화 예금은 922억6000만 달러(약 136조 원)로 1분기 833억9000만 달러(약 123조 원), 2분기 916억7000만 달러(약 135조 원) 대비 각각 10.6%, 0.6% 늘었다. 고환율이 이어질 거라는 전망 속에 기업들이 외화 보유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철강업계에서는 철광석·유연탄 가격 상승과 고환율이 겹치며 t(톤)당 수십달러 수준의 원가 부담이 늘어난 것으로 추산한다. 최근 호주산 프리미엄 하드코킹석은 t당 200달러선, 철광석(62% 기준)은 t당 100달러 안팎까지 올라 3분기 내내 고점 수준이 이어지며 추가 부담이 누적됐다. 포스코·현대제철 등은 원료 가격이 환율과 연동되는 구조여서 환율 변동성이 곧바로 제조원가로 이어진다. 한 철강업계 관계자는 “제품 수출 외화로 원료를 사들이는 내추럴 헤지, 통화스와프·선도거래 등으로 환리스크를 관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유업계는 연간 10억 배럴 이상 전량 수입하는 원유가 모두 달러로 결제돼 직격탄을 맞았다. 원유 구매 결정부터 대금 결제까지 수개월 시차가 있어 그 사이 환율이 오르면 환차손 발생 가능성이 높다. 수출로 일부 상쇄할 수 있지만 경영 불확실성은 커지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3분기 말 기준 환율이 10% 오를 경우 법인세 차감 전 순이익이 약 1544억 원 감소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석유화학 업종도 나프타·액화천연가스(LNG) 등 핵심 원료를 전량 수입하고 있어 충격이 크다. 석유화학업계 관계자는 “환율 변동성이 커지면 내년 사업 계획을 세우기도 어렵고 내수 비중이 높은 업체는 타격이 더욱 크다”고 말했다.
항공업계는 비용 구조상 고환율에 가장 취약한 업종 중 하나다. 항공유는 매출원가의 약 30%를 차지하고 항공기 리스료·정비비·해외공항 사용료 등 대부분이 달러로 결제된다. 대한항공은 원·달러 환율이 10원 오를 때마다 외화평가손익이 약 480억 원 감소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환율 상승은 여행 수요에도 영향을 미친다. 해외여행 경비가 늘며 지난달 국제선 여객 증가율은 전년 대비 6%에 그쳤다.
반도체 업계는 장비·부품 구매 비용 폭등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는 대당 가격이 3억 달러 수준으로 알려져 고환율 시 부담이 급격히 확대된다. AI·첨단 공정 확대로 장비 투자가 확대되는 상황에서 환율 상승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의 투자 여건에도 부담이다.
자동차 산업에서는 환율 상승으로 달러 결제 비중이 높은 전장·반도체·전자모듈 단가 부담이 전반적으로 커졌다. 완성차뿐 아니라 1·2차 부품 협력사까지 원가 압박이 번지며 “고환율이 공급망 전반의 구조적 리스크가 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해운·물류 부문에서는 글로벌 운임과 보험료가 고환율과 맞물려 해외 조달비가 두 자릿수 수준으로 뛴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이는 수출 제조업의 가격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다.
중소 제조업은 대기업보다 충격이 더 크다. 대기업과 달리 해외 원료·부품 구매를 위한 달러 헷지 수단이 부족하고, 거래 규모가 작아 수입단가 협상력이 낮기 때문이다. 중기중앙회 조사에서도 환율 급등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응답은 수입 의존 기업에서 82.8%로 압도적으로 높았다. 한 중소 자동차부품 업체 관계자는 “환율이 오를 때마다 원가가 즉시 뛰는데 납품가는 수개월 단위로 묶여 있어 적자를 감수하는 달이 늘고 있다”며 “환헤지 비용조차 부담하기 어려워 사실상 환율 변동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중소 기계·설비 업계 관계자는 “핵심 부품 가격이 10~20% 오른 데다 운임·보험료까지 인상됐다”며 “고객사에 비용을 전가하기 어렵고 금리 부담까지 겹쳐 투자 여력이 크게 줄었다”고 토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