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것이 한국 자본주의가 마주한 근본적 위기였다. 동시에 한국경영학의 위기이기도 했다. 기업의 목적은 무엇인가? 기업의 문제는 돈을 못 버는 데 있지 않았다. 한국경영학에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경영기법의 개선이 아니었다. 기업이 자본주의의 중심에 다시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었다.
1984년, 경영학의 오래된 틀을 흔든 중요한 이론이 등장했다. 바로 이해관계자 이론이었다. 그리고 2019년, 미국의 주요 기업 대표들은 기업의 목적을 더 이상 주주 이익만으로 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고객, 직원, 협력업체, 지역사회, 환경까지 함께 고려하는 경영을 기업의 새로운 방향으로 삼은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방향을 다시 묻는 큰 전환이었다.
이 흐름의 중심에는 에드워드 프리먼 교수가 있었다. 그는 밀튼프리드만식 주주 중심 자본주의가 너무 단순한 인간관과 좁은 기업관에 갇혀 있다고 보았다. 기업을 오직 돈을 버는 기계로 보고, 경영자를 주주의 이익만 대신 실현하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순간, 기업은 사람을 잃고 사회를 잃으며 결국 지속가능성도 잃게 된다고 보았다. 오늘 우리가 겪는 기업 불신, 조직의 냉소, 사회적 갈등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누적된 주주 중심 체제의 결과였다.
애덤 스미스는 시장만 강조한 사상가가 아니었다. 그는 인간 마음속에 있는 ‘공정한 관찰자’를 중요하게 보았다. 이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게 만드는 내면의 기준이었다. 서구 시민사회가 자유를 확대하면서도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떤가. 숫자는 커졌지만 신뢰는 줄어들었다. 성과는 늘었지만 공감은 약해졌다. 효율은 높아졌지만 존엄은 흔들렸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기술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도덕적 중심을 다시 세우는 일이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바로 그 복귀의 이름이었다.
특히 한국 사회는 이 문제를 더 뚜렷하게 겪고 있었다. 법조계와 회계업계, 학계에는 여전히 대리인 이론의 그림자가 짙었다. 이 관점에서 경영자는 주주의 단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존재로 이해되었다. 그러다 보니 기업의 평가는 단기 재무성과에 치우쳤고, 직원과 협력업체, 지역사회는 쉽게 비용처럼 취급되었다. 그 결과는 분명했다. 조직은 눈앞의 실적을 위해 장기 신뢰를 희생했고, 시장은 커져도 생태계는 약해졌으며, 사회적 갈등과 규제 부담은 커졌다. 주주를 위해 설계한 체제가 오히려 주주의 장기 이익까지 해치는 역설이 여기서 생겼다.
특히 단기성과 중심의 주주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사모펀드의 확산 문제도 심각했다. 사모펀드는 본래 기업의 비효율을 개선하고 자본시장의 역동성을 높이는 기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미래를 향한 기업가정신보다 현재 주주의 단기 수익을 우선하는 관리자정신이 강화되는 부작용도 커지고 있었다. 기업의 장기 투자, 고용 안정, 협력업체와의 신뢰, 지역사회와의 관계보다 단기 재무성과와 투자 회수 논리가 앞서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결과 기업은 창업가적 모험과 혁신의 공동체라기보다 재무적 수익을 극대화하는 관리 대상처럼 취급되기 쉬웠다.
대표적인 사례가 홈플러스와 고려아연 사태였다. 이들 사례는 단순한 개별 기업의 경영권 분쟁이나 재무 전략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 기업 생태계에서 주주 중심 단기성과주의가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기업은 단순한 주식의 묶음이 아니었다. 기업 안에는 직원의 생계, 협력업체의 미래, 지역사회의 안정, 고객의 신뢰, 국가 산업의 기반이 함께 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기업을 단기 수익률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기업가정신은 사라지고 관리자정신만 남게 되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모펀드의 사법권력화였다. 사모펀드의 영향력 확대 과정에서 거대 로펌과의 결합이 강화되고 있었다. 자본의 힘과 법률 네트워크가 결합하면서 기업 경영의 중요한 문제가 법정과 법률 전략의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는 소상공인과 중소기업이 거대 자본과 대형 로펌의 법률 네트워크에 대응하기 어려운 구조와 닮아 있었다. 자본의 힘이 법의 언어를 빌려 기업 생태계 전체를 압박하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한국경영학계가 충분히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더욱 심각했다. 기업의 병이 깊어지고 있는데 경영학이 진단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마치 의학계가 환자의 고통에 무관심한 것과 같았다. 경영학은 기업을 위한 학문이어야 했다. 기업을 단기 재무성과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조직, 산업과 사회가 함께 살아가는 생명체로 보아야 했다. 그런 점에서 한국 이해관계자경영학의 역할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이해관계자경영학은 단기 주주가치의 편향을 넘어 기업의 장기 가치, 사회적 정당성, 산업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함께 다루는 새로운 경영학의 중심이 되어야 했다.
프리먼 교수가 던진 핵심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강했다. 자본주의를 버리자는 것이 아니었다. 경영에 ‘그리고’의 정신을 더하자는 것이었다. 목적 그리고 이윤, 이해관계자 그리고 주주, 사회 그리고 시장, 인간 그리고 경제, 경영 그리고 윤리. 이것이 그가 강조한 핵심이었다.
이를 실천한 한국 기업이 있었다. 지난 5년간 급성장하며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한 성심당이었다. 성심당은 목적의 시대를 열었다. 성심당 서프라이즈의 비밀은 하나의 마법의 질문에 있었다. “나는 동료의 성공에 어떻게 기여했는가?”였다.
성심당은 ‘나눔’과 ‘혁신’을 대립시키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기업은 나눔을 비용으로 생각하기 쉽다. 많이 나누면 이익이 줄어든다고 본다. 그러나 성심당은 반대로 움직였다. 나눔이 신뢰를 만들었고, 신뢰가 고객의 사랑을 만들었으며, 고객의 사랑이 다시 매출과 브랜드 자산을 키웠다. 이것이 성심당 모델의 핵심이었다. 나눔은 비용이 아니라 브랜드 신뢰자본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해관계자 경영의 힘이었다. 성심당은 바로 그 점을 보여주었다.
첫째, 기업은 목적과 이윤을 함께 가져야 했다.
이익은 필요하지만 목적은 아니었다. 피가 인간 생존에 꼭 필요하다고 해서 삶의 목적이 피를 만드는 데 있지 않은 것과 같았다. 기업도 이익이 없으면 지속될 수 없지만, 이익만으로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위대한 기업은 언제나 어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목적에서 출발했다. 중요한 것은 그 목적이 구호에 그치지 않고 조직의 운영과 문화, 고객 서비스와 브랜드에까지 살아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둘째, 이해관계자와 주주는 대립하지 않았다.
직원을 어떻게 대하는가는 고객 서비스로 이어졌고, 협력업체를 어떻게 대하는가는 공급망의 경쟁력으로 이어졌으며, 지역사회를 어떻게 대하는가는 기업의 신뢰와 평판을 결정했다. 결국 주주의 장기 이익은 이해관계자를 희생시켜 얻는 것이 아니라, 이해관계자와의 건강한 관계 속에서 만들어졌다. 기업은 단기 거래의 집합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계의 공동체여야 했다.
셋째, 기업은 사회 문제의 해결사여야 했다.
기후위기, 양극화, 일자리 불안, 지역 소멸과 같은 문제는 정부만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기업의 자본, 기술, 실행력, 혁신 역량이 함께 움직여야 했다. 이때 사회 문제 해결은 부담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 창출의 기회가 되었다. 사회를 살리는 일이 곧 시장을 키우는 일이 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했다.
넷째, 인간은 단순한 경제적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을 보상과 처벌에만 반응하는 존재로 보면 조직은 결국 창의성과 헌신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이기심만 가진 존재가 아니었다. 공감할 수 있고, 상상할 수 있고, 헌신할 수 있으며, 창조할 수 있었다. 리더십은 사람을 통제하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의 존엄을 지키고 잠재력을 끌어내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었다. 결국 조직의 힘은 자본보다 문화에서, 명령보다 몰입에서, 통제보다 자율에서 나왔다.
다섯째, 경영과 윤리는 분리될 수 없었다.
기업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정교한 협력의 제도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다면 윤리는 경영의 장식물이 아니라 경영 그 자체에 들어 있는 원리여야 했다. 윤리를 비용이나 제약으로만 보면 기업은 방어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그러나 윤리를 운영체계와 성장전략의 일부로 보면, 그것은 오히려 경쟁력을 만드는 힘이 되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이상론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성장 전략이었다. 고객을 살리고 가치를 만들어야 했다. 직원에게 투자해 성장을 돕고 몰입을 높여야 했다. 협력업체와 상생하여 산업 생태계를 튼튼히 해야 했다. 지역사회에 책임을 다해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해야 했다. 환경의 지속가능성에 기여해 미래의 기준을 선점해야 했다. 이 다섯 가지가 살아날 때 주주의 장기 이익은 결과적으로 따라왔다. 핵심은 순서였다. 주주 이익을 출발점으로 삼으면 모두가 소모되지만, 이해관계자 가치를 출발점으로 삼으면 주주 이익은 지속가능한 결과로 따라왔다.
프리먼 교수는 이해관계자 경영을 하면 곧 손해라는 이분법을 버리라고 말했다. 실제로 혁신은 충돌하는 가치들 사이에서 새로운 해법을 찾는 데서 나왔다. 환경을 지키면서 비용을 줄인 기업, 직원 복지를 높이면서 생산성을 높인 기업, 협력업체와 상생하면서 품질과 속도를 함께 확보한 기업이 이미 그 증거였다. 문제는 선택이 아니라 설계였다. 이익과 존엄, 경쟁력과 윤리, 성장과 지속가능성을 함께 묶어내는 경영 설계가 필요했다.
프리먼 교수의 질문은 단순하지만 깊었다.
“내 아이가 기꺼이 들어가고 싶어 할 조직인가?”
이 질문은 모든 경영자를 흔들어야 했다. 만약 내 자녀에게조차 권하고 싶지 않은 회사라면, 그 기업은 재무제표가 아무리 좋아도 이미 중요한 것을 잃고 있는 것이었다. 좋은 기업은 단지 돈을 잘 버는 기업이 아니었다. 사람을 성장시키고, 관계를 건강하게 만들며, 사회와 함께 웃을 수 있는 기업이었다.
주주 자본주의가 차가운 숫자의 세계라면,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함께 웃을 수 있는 세계였다. 저는 이것을 ‘돈의 경제’에서 ‘웃음의 경제’로의 전환이라고 보고 싶다. 숫자만 남는 성장에는 한계가 있었다. 공감이 사라진 효율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람을 잃은 기업은 결국 시장도 잃었다. 이제 대한민국의 기업가들은 단기 성과주의의 낡은 틀을 넘어야 했다. 이해관계자와의 공생을 통해 지속가능한 성장의 새로운 서사를 써야 했다.
결국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단순한 경영기법의 조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유에서 관계로, 착취에서 공생으로, 단기 수익에서 장기 가치로, 돈의 언어에서 사람의 언어로 옮겨가는 문명적 전환이었다. 자본주의가 다시 웃을 수 있으려면, 기업이 먼저 사람의 얼굴을 되찾아야 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모두가 함께 웃을 수 있는 자본주의를 다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기업의 최종 성과는 재무제표의 숫자만이 아니었다. 고객의 미소, 직원의 자부심, 협력업체의 신뢰, 지역사회의 박수, 미래세대의 안심까지 포함되어야 했다. 이것이 돈의 경제를 넘어 웃음의 경제로 가는 길이었다.
이해관계자 경영의 길은 멀리 있는 추상적 이론에만 있지 않았다. 이미 우리 곁에 있었다. 성심당이 그 길을 보여주었다. 돈의 경제를 넘어 웃음의 경제로 가는 길, 주주의 숫자를 넘어 이해관계자의 행복을 만드는 길, 그것이 지금 우리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말해야 하는 이유였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주주를 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주주가 오래 웃을 수 있도록 고객, 직원, 협력업체, 지역사회, 환경까지 함께 웃게 만드는 경영 설계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