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 일의 수명과 돈의 수명

입력 2025-11-1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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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경 콘텐츠혁신부문 에디터

▲이투데이 (이투데이)
▲이투데이 (이투데이)
퇴직연금 적립금이 지난해 처음 400조 원을 넘어섰다. 2006년 퇴직연금 시장이 본격화한 이래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500배 넘게 불어났고, 10년 뒤에는 1000조 원 규모로 커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는 고령화와 노후 불안이 만든 거대한 파이지만, 그 돈이 실제로 누구의 노후 안정을 지켜주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은행들은 ‘확정기여형(DC) 1위’, ‘개인형퇴직연금(IRP) 1위’를 내세우며 퇴직연금 수익률을 홍보하지만, 가입자의 약 90%는 여전히 일시금을 선택한다. 빚을 갚거나 자녀 결혼자금, 당장 생계를 위해 연금을 깨면서, 이름은 연금(年金)이지만 실상은 퇴직과 함께 사라지는 돈이 되고 있다.

한편, 정치권은 정년을 65세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연내 입법을 예고했고, 재계는 고용 경직 우려로 반발한다. 노동계는 “노인 노동자의 생존권”을 강조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년을 연장한다고 해서 노후가 보장되느냐는 점이다. 오래 일하는 것과 오래 살아도 버틸 경제력을 가지는 것은 다르다. 실제로 평균수명 85세 시대에 65세 은퇴는 여전히 조기퇴직이다. 퇴직 후 20년의 노후를 버틸 준비가 미흡한 상황이다.

더구나 ‘일의 수명’을 위협하는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 바로 인공지능(AI)이다. 법으로 정년이 늘어도 기업이 사람 대신 AI를 선택한다면 정년 연장의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AI가 단순 업무를 넘어 제조·서비스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일할 수 있는 나이’보다 ‘일이 남아 있는가’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65세까지 자리를 지키기보다는 45세부터 밀려나는 구조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의 정년 연장 논의는 여전히 ‘일이 존재한다’는 낙관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많은 현장에서 ‘일’의 형태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음을 체감한다. 법이 아니라 기술에 의해 일의 수명이 결정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고령층 고용이 늘수록 청년층 진입 기회는 줄어들고 세대 간 균형도 흔들린다. AI로 대체되는 일자리가 늘어나는 환경에서 정년만 늘린다면, 젊은 세대는 일터 문턱에서, 장년층은 일터 안에서 동시에 불안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다.

또 AI는 ‘돈의 수명’도 변화시키고 있다. 퇴직연금 운용에도 AI가 깊숙이 도입되어 로보어드바이저가 투자 판단을 내리지만, 이 기술이 가입자의 노후를 위한 것인지, 금융사의 수익률 경쟁을 위한 것인지 알기 어렵다. 알고리즘은 베일에 가려져 있고, 책임 주체도 불분명하다. 퇴직연금 400조 원 중 상당 부분이 이런 시스템에 맡겨질 것이다. 누가 그 돈의 위험과 책임을 짊어질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AI는 우리의 돈을 계산해주지만, 우리의 불안을 계산하지는 못한다. 아무리 기술이 진화해도, 퇴직 후 삶의 무게는 인간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는다.

정년 65세 시대가 오면, 일의 수명은 늘어날지 모르지만, 돈의 수명은 짧아질 위험이 있다. 임금피크제와 단기 재계약이 일반화하면서, 정년 연장이 실질적 소득 확대나 기회의 확장이 아닌 ‘존버’의 연장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으로 정년을 정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존엄한 노후는 법과 제도만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년 연장이 아니라 그 이후의 삶을 어떻게 지원할지에 대한 구조와 설계다. 기업은 고령 근로자의 생산성을 높이는 방안을, 정부는 퇴직연금의 실질소득 기능을 강화하는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400조 원에 이르는 퇴직연금이 진짜 노후 안전망으로 작동하려면, 기술보다 신뢰가 우선되어야 한다. 일과 돈의 수명을 함께 설계할 때야 비로소 ‘은퇴 후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

끝으로, ‘정년 65세 연장’ 논의가 탁상공론에 그쳐서는 안 된다. 입법자 중에 은퇴 후 생계 걱정을 체감한 이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평균 연령 56.3세로 '역대 최고령' 꼬리표가 붙은 22대 국회. 대부분의 입법자가 퇴직 연령을 훌쩍 넘기고도 4년짜리 고소득 계약직에 재취업해 권력까지 움켜쥐고 있다. 그들이 과연, 막막한 노후 앞에 선 가장들의 현실을 이해할 수 있을까.

허기진 서민의 삶을 채워줄 노후 대책이 표몰이를 위한 숫자놀음이 되어선 안 된다. 정년이 늘어난들 삶은 길어지고, 돈은 더 빨리 닳아간다. ‘일의 수명’이 늘어날수록, ‘돈의 수명’을 지킬 제도와 철학이 함께 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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