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출식 첫 여당 당대표 거쳐⋯30년 전 DJ 권유로 정치 입문
TK 출신 '추다르크'로 유명세..."절대로 포기 말라" 진심어린 당부
그렇다. 또 하나 깜빡 잊고 있었다. 그가 본지 인터뷰에 응한 진짜 이유를. 각종 현안으로 책임이 막중한 법사위원장 선출 직후 적어도 30개에 달하는 미디어에서 연신 러브콜을 보냈다. 혹여 회기 중 그의 말이 오해를 살까 싶어 모두 뿌리쳤다. 하지만 본지가 창간 15주년 맞아 기획한 15인의 여성 리더 인터뷰 시리즈 ‘K 퍼스트 우먼 : 한국 경제의 최초를 연 그녀들’만큼은 내치지 못했다. 추미애. 그 이름 석자를 기억하는 여성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만큼은 차마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성 후배들에게 그가 건넨 따뜻한 위로는 사람의 언어다. 그런 소통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안정된 법복을 벗고 사방이 뚫린 광야와도 같은 여의도 한가운데에 그가 서있다. 30년의 지난 세월에서 그를 버티게 한 것은 ‘용기, 사람, 상식’으로 압축된다. ※대담=석유선 생활경제부장

“똑같은 거예요, 사람은. 내가 특별한 용기가 있는 게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부딪혔는데 ‘여기서 주저앉으면 큰일 나겠구나. 없는 용기도 내보자’ 그렇게 다지는 거죠.”
30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난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목소리는 낮고, 단정했다. 한 번 고른 단어는 쉽게 번복되지 않았다. 그는 1995년 첫 만남의 고(故) 김대중(DJ) 전 대통령을 떠올렸다. “처음 뵈었을 때 그러셨어요. ‘사실 고백할 게 있는데 내가 눈물도 많고, 걱정이 많아요. 그런데 없는 용기도 다 끌어모아 내는 거예요.’ 사람은 다 똑같다고, 그 말이 큰 위로였죠.”
이런 그에게 역사는 늘 ‘최초’를 맡겼다. 첫 여성 판사 출신 국회의원, 첫 여성 여당 대표, 첫 여성 6선 의원. 그러나 추 의원은 그 기록들을 화려한 업적으로만 기억하지 않았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 된다”며 없는 용기를 내던 순간들, 침묵과 고뇌로 다져낸 신념의 시간으로 남아 있다. 원칙을 붙잡되, 사람의 언어로 답하려 했던 지난 세월. 인터뷰 내내 그는 카리스마보다 온기 있는 목소리로 그 길을 풀어냈다.
1982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춘천·인천·전주지법과 광주고법에서 판사로 일했다. 법복은 안정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1995년 DJ의 부름 앞에서 그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법정의 독백을 뒤로하고 광장의 대화를 택했다.
추 의원은 “만약 제가 저 세계에 계속 있었다면 보통 사람의 기준과 단절된 채 혼자 자부심 가득한 삶을 살았을지도 몰라요. 빠져나오길 정말 잘했죠”라고 곱씹었다. 지금의 그는 “정치는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다시 풀어 쉬운 언어로 답하는 일입니다. 생각만 하고 전달하지 못하면 정치는 아니죠”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1996년 서울 광진을에서 15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이후 16·18·19·20·22대까지 6선을 채웠다. ‘TK(대구·경북) 출신’, ‘여성’, ‘판사 출신’ 정치인이라는 ‘이질’의 조합은 그를 설명하는 고유명사가 됐다. 그는 “정치는 자기 자랑이 아니라 사람과 사회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시 말해주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정치 입문 직후 추 의원은 ‘제주 4·3 특별법 제정’이라는 무거운 과제를 마주했다. 그는 “‘빨갱이’라는 낙인을 걷어내려면 증거가 필요했어요.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를 찾아 들이댔습니다. ‘여기 증거가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라고 말했다. 명단에는 15세 어린 소년도 있었고, 우체국 직원, 공무원 교사, 심지어 평범한 시골 할머니들이 있었다.
추 의원은 “증거를 들고 주장하니까 이제 사람들에게 그 주장이 들리기 시작했다”며 “우리가 이 사건을 색칠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관심 두는 걸 두려워했구나. 안 보려고 했구나’ 생각했어요”라고 말했다.
공감의 울타리가 커지자 제주 4·3 특별법 제정에 앞장섰다. 20여 년 뒤 법무부 장관으로서 다시 4·3 사건과 마주했을 때 그는 직권 재심과 배상 판결의 길을 열었다. 초선 때 특별법으로 명예회복의 문을 열었다면 장관 때는 그 명예가 보상으로 이어지게 했다. 그렇게 문학의 소재로만 취급되던 비극이 국가의 기록으로 옮겨 앉았다.
“단계를 거치고, 또 인내하고 참아야지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어요. 처음엔 불가능해 보이던 일이 실행되면 성과가 되더라고요. 그게 정치의 매력이죠”라고 추 의원은 말했다.
1997년 대구 지역 대선 유세. 그의 “지역감정의 악령을 깨자”는 외침은 곧 ‘추다르크’라는 별칭으로 이어졌다. 이름은 기대를 불렀고, 기대는 책임으로 돌아왔다.
2016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된 추 의원은 책임은 너무 커졌다. 진통 끝에 여당도 야당도 더는 묵과할 수 없는 책임의 정치를 이끌어 냈다. 결과는 정권 교체. 여성 첫 여당 대표 임기의 시작은 그렇게 쓰여졌다. 이후 탄생한 문재인 정부와 함께 2018년까지 당대표로서 호흡을 맞췄다.
법무부 장관 시절의 시간은 더 치열했다. 검찰개혁은 권력 구조를 흔드는 일, 저항은 예고된 것이었다. 추 의원은 “같은 결정을 남성 장관이 했으면 ‘정치적 소신’으로 불렸을 일들이 내겐 ‘무모’나 ‘감정’으로 평가절하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흔들림 없이 버텼고, 평가는 결국 성별이 아닌 결과로 모아졌다. “중요한 건 성별이 아니라 맡은 자리에서 얼마나 책임 있게 행동하느냐죠.”
‘최초’의 길은 좁고 낯설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는 이중 잣대,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의 벽, 회식·사적 관계가 빚는 배제의 관행 속에서 그는 “티 내지 말고 실력으로 증명하자”는 원칙으로 버텼다. 1996년 국정감사장에서 경찰의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여대생 성폭력 피해 사실을 읽어내던 30대의 젊은 초선 의원을 향해 ‘품위’ 운운한 조롱이 이어졌지만, 그는 갖은 비난을 뚫고 현재의 변화로 길을 이었다. “책임 회피라는 말을 제일 싫어해요. 정치는 책임지는 일이어야 하니까요.” 그의 정치가 거친 파고에도 제자리를 지킨 이유다.
추 의원은 결정을 서두르지 않는다. 다만 그의 하루는 다소 느슨한 리듬으로 시작된다. “아침에 눈 뜰 무렵, 복잡한 것들이 정리됩니다. ‘아, 이게 이런 구조였구나. 그렇다면 이렇게 가야겠네.’ 그때 비로소 답이 보이죠.” 즉답보다 숙성, 오래 가는 설득을 택했다.
정치 여정의 동력은 가까운 곳에서 왔다. 정치 입문을 권유했던 남편은 이해충돌을 피하기 위해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변호사 사무실을 정리했고, 장관 지명 때도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자리를 정리했다. 추 의원은 “정치가 책임지는 일이라면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책임을 가능케 한 동력이었다”고 말했다.

인터뷰 말미 요즘 청년 얘기를 꺼내자 추 의원은 잠시 숨을 골랐다. “우리 때는 자격을 갖추면 길이 보였죠. 지금은 스펙이 삶을 대신합니다. ‘내가 맞춰야 선택받는’ 구조 속에서요” 그럼에도 충고는 단호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 약자의 편에 서라.”
추 의원은 여성 정치인으로서 마주한 이중 잣대를 잘 안다. “같은 일을 해도 남성은 ‘소신’이라 하고 여성은 ‘감정’이라 불렸죠” 그러나 그럴수록 더 강조한다. 성별보다 책임, 그리고 결과. 기후위기·저출생·돌봄과 노동, 여성의 삶과 사회의 지속가능성이 겹친 의제들을 국가의 중심으로 끌어올리는 일. 그는 이것이 여성 리더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성평등 없는 지속가능성은 공허한 구호일 뿐이니까요.”
‘최초’ 이후 무엇을 남기고 싶으냐에 그는 “문을 더 넓히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여성 최초라는 자리의) 책임은 곧 부담이기도 했지만, 여성 리더가 흔들리면 후배 세대 전체가 흔들린다는 생각으로 버텼다”고 했다. 6선 국회의원, 민주당 대표, 법무부 장관, 국회 환노위원장·법사위원장… 수많은 직함은 결국 문턱을 낮추기 위한 도구였다. 정치가 사람의 도리를 회복할 때 ‘여성 최초’는 더 이상 뉴스가 아닌 사회의 상식이 됐다. 인터뷰 내내 그가 ‘사람’의 언어를 조용하면서도 단호하게 반복한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