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방버스 운영하고 휴식시간 늘리고…기업들도 전쟁
뒷북 대책 나왔지만 강제성 없어
“산안법 개정 미리 했어야”

배준경 마트산업노동조합(마트노조) 조직국장은 10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국내 유통기업 근로자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이 같이 언급했다. 주요 대형마트 직원들을 조합원으로 두고 있는 마트노조는 매년 심화하고 있는 이상기후 리스크에 직원들의 생명권 보장을 위한 ‘폭염감시단’ 운영 중이다. 이를 통해 각 유통업체 폭염대책 미비 ‘제보센터’를 운영하고 현장 점검에 나선다.
제보센터에 신고 접수된 사례는 다양하다. 한 유통업체에서는 직원들이 더위를 피하도록 현장에 설치된 대형 산업용 냉풍기를 임원이 미관상 보기 좋지 않다는 이유로 더운 공기가 나오는 서큘레이터로 대체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또 폭염 속 쉴 공간이 절실한 직원들을 위한 휴게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않아 고용노동부 권고를 받은 곳도 있다. 8일에는 경기 고양시 한 대형마트에서 60대 노동자가 숨져 경찰이 사망 원인 조사에 나섰다. 앞서 2023년에도 30대 남성이 폭염 속에 카트 정리와 주차 관리를 하다 숨졌다.
비단 유통업계 뿐일까. 철강, 조선 등 중후장대 산업과 건설업계는 야외 현장 근로자가 많고 장시간 고온의 열에 노출되는 직종이다. 특히 건설현장에는 고령자가 많다. 한국건설인정책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올해 2월 기준 건설기술인 평균 연령은 52.2세로 나타났다. 특히 60대 이상은 27만7432명으로 40대(25만8143명)보다 많았다.
옥외 작업이 많은 건설·조선업종 사업장을 비롯해 온열질환 산업재해가 자주 발생하는 물류 업종 사업장은 ‘폭염 고위험 사업장’으로 분류된다. 고용부에 따르면 폭염 고위험 사업장은 전국 6만 개소에 달한다.
8일 하루에만 전국에서 발생한 온열 질환자는 238명. 하루에 온열 질환자가 200명을 넘은 것은 드문 일이다. 질병관리청 집계에 따르면, 5월 15일 이후 발생한 온열질환자 수는 총 1228명에 달한다. 사망자도 벌써 8명이다. 재해는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지난 7일 경북 구미시 아파트 공사장에서 베트남 국적의 23살 일용직 노동자가 앉은 채로 사망했다. 당시 구미 낮 최고 기온은 35도를 기록했다. 발견 당시 체온은 40.2도였다.
기업들도 폭염과의 전쟁에 나섰다. 조선소의 경우, 한화오션은 7월부터 9월까지 냉방버스를 운영하고 체감온도가 33도를 넘으면 오전 10시와 오후 3시 휴식시간을 10분에서 20분으로 연장하는 조치를 취했다. 현대제철은 고위험 폭염작업을 제한하고 체온, 혈압, 음주 측정 등 일일건강확인제도를 운영 중이다. 포스코이앤씨와 DL이앤씨 등 대형 건설사들도 보냉제품 지급, 휴식 시간 보장 등 관련 대책을 세웠다.
사망자가 발생해야 나오는 뒷북 대책은 아쉬운 대목이다. 고용부는 구미에서 20대 노동자가 숨진 뒤인 9일에야 산재 예방을 위한 범정부 협의체를 꾸렸고, 건설·조선·물류 등 폭염 고위험 사업장 현장점검에 착수했다. 아울러 ‘33도 이상 폭염 시 매 2시간 이내 20분 이상 휴식 의무화’를 재추진할 계획이다.
정부의 가이드라인은 말그대로 가이드라인에 그친다는 점이 문제다. 고용부에 이어 국토교통부도 전날 지자체, 건설사 등을 향해 폭염이 극심한 시간대에는 건설 공사 작업을 중지할 것과 함께 폭염 작업 시 2시간마다 20분 이상 휴식 시간 부여 등 안전 관리를 당부했다. 그러나 실제 건설 현장에서는 공사 기일 압박으로 인한 근무시간 조정이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재희 건설노조 노동안전보건실장은 “건설 현장은 다단계 하도급 구조다. 최저가 낙찰제와 맞물려 속도전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노동자가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는 구조”라며 “노동자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경우가 많아 작업을 쉬면 금전적인 불이익도 감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제성 없는 가이드라인,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걸릴 지 모르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온열 재해는 ‘예견된 참사’라는 지적도 나온다. 당장 폭염으로부터 노동자 안전을 지킬 수 있는 실효성 있는 방안이 없다는 것이다. 최혜인 직장갑질119 노무사는 “해마다 더워지고, 누가 사망했다고 하면 그제야 온열 산업재해 문제가 대두된다. 행정력은 구석까지 미치지 않고 가이드라인을 지키지 않는 사업장이 많다. 미리미리 법 개정 등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복되는 문제”라고 짚었다.
최 노무사는 “산안법에 폭염과 관련한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굉장히 모호하고 회사 여건에 따라 보건조치 내용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면서 “산안법이 개정되더라도 전자기기 수리 노동자, 가스 검침원 등 특수고용 형태 노동자들은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