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법치 해쳐” 통합가치 훼손 논란

“몰타의 ‘황금 여권’은 유럽연합(EU) 시민권을 상업적 거래의 하나로 만들었다. 이는 EU의 가치를 위반한다.”
지난 4월 29일 EU 법원(유럽사법재판소)은 몰타 정부가 60만 유로, 약 9억 원을 투자하면 시민권을 주는 황금 여권(golden passport)이 EU법을 위반한다고 판결했다. EU의 행정부 역할을 하는 집행위원회는 몰타 정부가 폐지 권고를 거부하자 제소해 승리했다. 이제 몰타는 이 프로그램을 폐지해야 한다.
지중해에 있는 몰타는 1년 내내 짙푸른 파도와 태양을 즐길 수 있는 유명한 휴양지다. 부유한 중국인과 러시아인들이 황금 여권을 보유 중이며 이들이 몰타 시민권을 얻으면 자동적으로 EU 시민권도 획득한다. EU 27개 회원국 시민들은 비자없이 나머지 26개 회원국으로 자유이동이 가능하다. 키프로스와 불가리아는 유사 프로그램을 폐지했고 포르투갈 등은 취득 조건을 더 강화했다. 반면에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500만 달러(약 67억 원) 정도를 투자하면 영주권을 주겠다고 발표했다.
2017년 10월 16일. 작열하는 지중해 태양이 내리쬐던 오후 2시 58분. 53세 탐사보도 전문 여기자 대프니 갈리치아는 집앞에 주차된 소형차 푸조108에 시동을 걸었다. 시동과 함께 운전석 밑에서 폭탄이 터져 그는 즉사했다. 다음날부터 몰타에서 수만 명이 그녀를 추도하며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20년 넘게 탐사보도 기자로 활동하던 그는 황금 여권과 관련한 의혹을 잇따라 보도했고 공개적으로 살해 협박에 시달렸다. 사망 당시 그는 50건의 명예훼손으로 재판을 받고 있었을 정도로 부자와 집권층에 눈엣가시와 같았다. 이듬해 말 두 명의 청부 살인자가 체포돼 아직까지 재판을 받고 있다. 정부 고위층의 일부 연계도 드러났다.
몰타 정부가 정확한 자료를 공개하지 않지만 일부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2013년에 이 제도가 도입된 후 지난해 말까지 약 2273개의 여권이 발급됐다. 이 가운데 러시아 신흥재벌인 올리가르히 7명이 몰타 시민권을 얻었다. 이들은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미국과 EU의 제재대상이 됐다. 수천억 원이 넘는 초호화 요트가 지중해 항구에 발이 묶인 것도 이 때문이다.
대프니 기자의 피살 후 몰타의 시민단체와 국제투명성기구는 집행위에 이 제도의 폐지를 줄기차게 요구했다. 집행위는 27개 회원국이 EU조약이나 규정 등을 준수하는지를 감독한다. 법 위반을 알게 되면 집행위는 먼저 회원국에 이 사실을 통보하고 회원국의 의견을 청취한다. 이 단계에서 회원국의 조치가 미흡하다고 판단되면 EU법원에 제소한다. 몰타의 황금 여권은 집행위가 제소한 지 2년이 넘어 지난달 말에 결과가 나왔다.
집행위원회는 소송에서 “이 제도가 유럽연합 시민권의 본질과 통합을 해친다”라며 “이 프로그램은 부패와 돈세탁, 세금 회피와 같은 심각한 리스크를 제기한다”고 폐지를 요구했다. 자유와 법치주의 준수와 같은 게 시민권을 얻을 때 포함되는 내용인데 단순하게 고액의 투자만으로 시민권을 판매할 수 없다는 것이다.
EU 집행위는 유사한 프로그램을 운영 중인 여러 회원국에 폐지나 개정을 요구해왔다. 이에 따라 포르투갈과 헝가리는 투자 이민자에게 여권이 아니라 투자 기간만큼만 체류허가증 수여로 급을 낮추었다. 포르투갈은 부동산 투자를 폐지하고 50만 유로를 투자 펀드에 넣도록 조건을 변경했다.

또 황금 여권 판매에 열을 올려온 EU 소국들은 이 여권을 폐지했다. 지중해의 섬나라 키프로스는 몰타와 함께 2004년 5월 유럽연합 회원국이 됐다. 키프로스는 2013년부터 220만 유로, 약 33억 원 정도를 부동산에 투자하면 시민권을 줬다. 이 프로그램으로 키프로스는 2013~2019년 7년간 70억 유로, 약 10조5000억 원 정도를 벌었다. 국내총생산(GDP)의 25% 정도를 차지하는 거액이다. 발칸 반도의 불가리아도 유사한 제도를 운영했으나 두 회원국은 2년 전에 이를 폐지했다. EU서 탈퇴한 영국은 2022년에, 스페인은 지난 4월에 투자 이민제를 없앴다.
EU 각 회원국이 이 프로그램 폐지나 축소를 시행하자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이때다 싶어 새로운 투자 이민제를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월 27일 500만 달러를 투자하면 영주권을 주겠다고 밝혔다. 1990년대부터 이 투자금액은 80만 달러였는데 이를 6배 넘게 올렸다. 트럼프는 “이 황금카드는 미친 듯이 팔릴 것이다. 미국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경로다”라고 자랑했다. 미 대통령은 러시아 올리가르히에게도 이 비자가 가능하냐는 질문에 “아마도 그럴 것이다. 몇몇 러시아 올리가르히는 아주 좋은 사람들이다”라며 뭐가 문제냐는 반응을 보였다.
미 국무부 자료를 보면 지난해 1월부터 9월까지 1만2000여 명이 이 비자를 얻었는데 이 가운데 69%가 중국인으로 조사됐다. 현재 미국의 제재 리스트에 올라 있는 인사는 이 비자를 신청할 수 없다. 그러나 미국의 제재 대상이 아닌, 영국이나 EU 제재자들은 이 비자 신청이 가능하다.
EU의 황금 여권 단속은 비단 회원국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남태평양의 바누아투는 개인이 최소 13만 달러, 1억7500만여 원를 투자펀드에 납입할 때 황금 여권을 준다. 바누아투의 황금 여권 획득자 상당수 역시 중국의 부자들이었다. EU는 원래 바누아투 여권 소지자에게 한국인처럼 3개월 무비자 여행을 허용했다. 그러나 지난해 말부터 이 여권 소지자들의 무비자 여행을 금지했다. 회원국에게 불허한 것을 비회원국에게 허용할 수 없다는 내부 의견이 강했기 때문이다. 바누아투는 황금 여권을 얻으면 130여 개국 무비자 여행이 가능하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으나 이제 여기에서 EU 27국이 제외되니 그만큼 이 여권의 매력도 줄어들게 됐다.
EU는 그동안 비판을 받아온 황금 여권을 늦게나마 폐지하거나 취득 조건을 더 까다롭게 만들었다. 반면에 미국은 인권 등을 제쳐두고 돈벌이에 혈안이 됐다. 대서양을 사이에 둔 미국과 유럽의 엇박자는 우크라이나 전쟁 해법뿐만 아니라 황금 여권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대구대 교수(국제정치학)
‘하룻밤에 읽는 독일사’ 저자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