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찍은 필름, 밤마다 뉴욕으로…‘패스트 라이브즈’가 여운을 남긴 방법[오코노미]

입력 2024-03-22 16:45 수정 2024-03-22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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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포스터)
▲(출처=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포스터)
12살 해성(유태오 분)과 나영(그레타 리 분)은 서로의 첫사랑이다. 같은 동네, 같은 학교,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마음으로 연결된 두 사람은 나영이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며 멀어진다. 그리고 12년이 지난 어느 날, 12살에 멈춰있던 두 사람의 기억이 노트북을 사이에 두고 다시 흘러가기 시작한다.

“와, 너다” 12년 만에 만난 해성과 나영은 단숨에 다시 연결된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흐릿해졌을지언정 사라지지는 않았다. 문제는 해성은 서울에, 나영은 뉴욕에 있다는 것이다. 영상통화와 전화, 메일을 통해 일상을 공유할수록 서로를 향한 그리움이 깊어져 가지만, 젊고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것도 많은 두 사람은 재회를 미룬다. 두 사람 중 누구도 자신의 현재를 뿌리치고 상대에게 달려가지 않는다. 미국과 한국 사이에 있는 드넓은 태평양이 야속하게만 느껴질 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의 연결은 다시 끊어진다.

▲(출처=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컷)
▲(출처=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컷)
12년이 또 흘렀다. 해성은 마침내 나영이 있는 뉴욕에 왔다. 그러나 나영의 옆에는 남편이 있다. 그리고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나영을 노라라고 부른다. 해성과 있을 때만 나영이 되는 나영. 해성은 수많은 ‘만약’을 그리며 조심스럽게나마 나영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 보지만, 이내 깨닫는다. 나영은 자신의 곁에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떠나는 사람이다. 그 사실이 사무치게 슬프지만, 해성은 나영이 떠나는 사람이어서 나영을 사랑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해성도 이제 떠날 수 있는 사람이다. 해성은 그렇게 뉴욕을 떠난다. 그리고 나영은 해성을 보낸 뒤 눈물을 쏟는다. 누가 이제 나영을 나영이라고 부를까. 그런 나영을 남편 아서(존 마가로 분)가 꼭 안아준다.

▲셀린 송 감독. (출처=a24 인스타그램 캡처)
▲셀린 송 감독. (출처=a24 인스타그램 캡처)
셀린 송 감독의 데뷔작인 ‘패스트 라이브즈’는 지난해 1월 미국 선댄스영화제에서 최초공개된 것을 시작으로 현지 매체와 평론가, 관객들로부터 ‘올해의 영화’라는 극찬을 받으며 ‘전 세계 영화제 77관왕, 218 노미네이트’라는 역사를 썼다.

특히, 해외에서는 작품을 관통하는 개념인 ‘인연’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데 해외 매체와 평론가, 관객들은 생소한 개념을 설득력 있게 이야기에 녹여낸 셀린 송 감독의 섬세함에 찬사를 보냈다. 또한, 셀린 송 감독은 영화 촬영에 있어 아날로그 예술 방식인 ‘35mm 필름 촬영 방식’을 선택했는데 이 또한 영화 경쟁력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필름 특유의 화질과 색감이 영화를 관통하는 ‘인연’과 ‘전생’이라는 주제는 물론 영화 곳곳에 담긴 공백과 애틋한 분위기를 섬세하게 표현해 냈기 때문이다. 다만, 셀린 송 감독에 따르면 필름 촬영이 수월했던 것은 아니다. 필름 가격 자체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또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필름 영화 촬영이 드문 한국에서 필름을 현상할 수 있는 곳이 없어 셀린 송 감독은 매일 밤 당일 촬영본을 박스 포장해 미국 뉴욕으로 보내야 했다. 배송 중 조금만 잘못돼도 촬영분이 사라질 수 있다는 리스크가 있어 필름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전문가까지 고용했을 정도다. 셀린송 감독의 말처럼 국내에는 더 이상 영화필름을 현상할 수 있는 현상소가 없다. 촬영 및 편집이 편리하고 효율적이며 경제적이기까지 한 디지털 촬영 방식이 대세로 자리 잡으며 영화 필름을 제작하는 필름 제작사나 필름을 현상하는 현상소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는 국제적인 추세로 한국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출처=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컷)
▲(출처=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컷)
그러나 디지털 촬영 방식이 대세로 자리 잡은 시대에도 여전히 필름 촬영 방식을 고집하는 감독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 ‘오펜하이머’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지난해 8월 tvN 시사교양 프로그램 ‘알쓸신잡’에 출연해 “요즘엔 필름으로 촬영하지 않고 디지털 촬영과 CG 의존이 우세한데 필름 촬영을 고수하는 이유가 있냐”라는 장항준 감독의 질문에 “필름의 화질과 질감이 눈에 보이는 것과 비슷하게 세상을 포착하기 때문”이라며 “관객이 영화를 통해 현실을 감각하길 바란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이러한 신념에 따라 이번 ‘오펜하이머’ 촬영도 필름 촬영 방식으로 진행했는데 ‘오펜하이머’ 촬영감독을 맡은 호이트 반 호이테마는 오펜하이머를 코닥의 65mm 대형 포맷 네거티브 필름 스톡으로 촬영했으며 특별히 코닥 측에서 ‘오펜하이머’의 흑백 장면을 위해 최초로 65mm 포맷의 더블-X 흑백 필름을 제작해 제공한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놀라운 점은 최근 국내외 유수 영화제 출품작 경향을 살펴볼 때 필름 촬영 방식을 사용한 영화의 수는 다시금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 덕에 필름 제작사와 현상사들의 지속가능성을 기대해볼 수 있게 됐다. 영화계에서는 필름 촬영 방식과 디지털 촬영 방식의 공존을 이상적인 상태로 본다.

디지털 촬영 방식을 선택했을 때 더 잘 표현되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필름 촬영 방식을 선택했을 때 더 잘 표현되는 영화도 분명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셀린 송 감독은 ‘인연’이라는 영화를 관통하는 개념과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인물, 촬영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많은 관객에게 여운을 남기는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패스트 라이브즈’를 보며 각자의 기억에 남아 있는 누군가를 떠올렸고 해성과 나영의 이야기는 모두의 이야기가 됐다.

▲(출처 = 영화 ‘패스트라이브즈’ 스틸컷)
▲(출처 = 영화 ‘패스트라이브즈’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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