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입력 2018-07-04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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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일을 잊은 자들의 앞날을 걱정하는 명사들의 조언은 흔히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라는 질타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그들의 말에는 아마 남에게 받았던 도움이나 힘들었던 시절을 기억하라는 뜻도 담겨 있을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

뜨거운 감자인 예멘 난민을 대하는 사회 일부의 시각을 접할 때면 우리가 주로 이웃 섬나라의 미래에 재를 뿌리고 싶을 때 쓰는 이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예멘 난민의 실체 공방은 잠시 접어두자. 어떻게 한국에 왔으며 무슨 꿍꿍이를 품었는지 따지는 논박은 사람 속을 넘겨짚는 부질없는 수고로움이다.

돌아봐야 할 대상은 오히려 스스로다.

1909년 도산 안창호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배후자로 지목돼 옥살이를 치른 뒤 소금상선을 타고 밀항해 위해위로 탈출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감시가 극에 달하자 백범 김구 선생은 좁쌀 장수로 가장해 상해로 건너갔다. 선생은 임시정부에서 장진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공식적으로 ‘김구’라는 사람은 없었던 셈이다.

예멘 난민들과 독립운동이 무슨 상관있느냐 따져 물을 것이다.

판결하나 소개한다. 2년 전 여름, 파키스탄 소수민족인 발루치족(族) 최초로 난민을 인정받았던 한 독립운동가가 우리나라 대법원에 의해 강제추방됐다.

그는 신분을 숨기기 위해 다른 사람의 여권으로 입국했는데, 우리 당국이 그가 속했다는 독립운동단체에 신분확인을 요청하자 그들은 “회원이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하지만 곧바로 변호사에게 연락해 “신분노출을 우려해 아니라고 한 것”이라 알려줬다. 법원은 “신빙성이 떨어진다”며 끝내 그를 내쳤다. 그는 재판과정에서 결국 신원이 노출됐고, 추방이후 생사는 오리무중이다.독립운동가라고 해서 특별히 봐주지 않는 백범과 도산의 후손, 법과 원칙의 대한민국이다.청산리 대첩을 이끈 독립군 수장 홍범도 장군은 일본 스파이를 의심한 스탈린에 의해 1937년 카자흐스탄으로 쫓겨났다. 그는 황무지 개간 농장 노동자와 극장 수위로 고달픈 삶을 보내다 쓸쓸히 죽음을 맞았다.

유럽의 이민자 폭력 사건이 반대의 근거인가. 미국 총기난사 역사상 가장 많은 이를 학살한 2007년 미국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은 한인 이민자 조승희다. 그의 누나는 명문 프린스턴 대학을 나와 미 국방부에서 일했다.

한 번 받아주기 시작하면 수백, 수천으로 불어나 결국 나라를 통째로 삼킬까 걱정인가. 1994년 난민조약에 가입한 한국에는 이미 800여명의 난민이 살고 있으며, 인도적 체류자는 1500명에 달한다. 이들이 한반도를 점령하고 이슬람화하려 했다면 20년 넘도록 애써도 성과가 없으니 실패로 봐도 무방하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후손들까지 가세하면 수만명이 될테니 경계할 일인가. 일제 강점기 옛 소련으로 이주한 고려인은 17만명이다. 세월이 흐르고 흘렀으니 이들의 후손은 아마 100만 명쯤 되지 않을까. 러시아는 곧 우리 땅이 될 모양이다.

난민이 우리 일자리를 빼앗는가. 그들이 노리는 건 우리가 원하는 강남 대기업 사무실인가. 아니면 기피하는 변두리 영세기업 생산라인인가.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비행기를 타고왔으니 가짜 난민이 의심되는가. 난민이 헐벗고 굶주린 보트피플이어야 한다면 병역을 거부하고 유럽행 비행기에 올라 난민을 인정 받은 한국인들은 국제사기꾼인가.

다 필요없고 테러집단 이슬람이라 안되겠다면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도 이 땅에서 내보내야 한다. ‘피의 일요일’의 북아일랜드 테러조직 IRA, 여객기를 납치한 독일·일본 무장단체 적군파는 모두 특정 종교로 결집한 폭력집단이다.

자국민도 어려운 판에 아까운 세금으로 난민을 돕느냐고 볼멘소리를 할 지 모르겠다. 만주를 침략당한 중국은 나라가 평안하고 자국민이 여유로워 백범과 도산을 품고 임시정부를 도왔을까.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사방 백리안에 배 곯는 이 없게 하라던 최 부잣집까지 갈 것도 없다. 2009년 우리는 OECD 개발원조위원회(DAC)에 가입했다. 나라잃고 떠돌던 난민의 후손, 원조 받아 연명하던 극빈국 국민이 선진국으로 일어서 은혜를 되갚는 사례는 인류가 생긴 이래 우리가 처음이다. 전세계로 번진 금융위기 탓에 모두가 원조를 줄이던 때에 우리는 곳간을 열었다. 개발원조위원회가 다른 선진국들의 인색함을 꾸짖을 때면 어김없이 “한국을 좀 보라!” 고함치는 이유다.

우리는 어떤 민족인가. 배달의 민족인가 배반의 민족인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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